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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평등경제를 지향해야
-경제영역에서의 한국교회 개혁과제-
2017년 05월 23일 (화) 17:55:53 박득훈 webmaster@eswn.kr

인생을 살아가면서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깊은 행복이 없다. 김근수 선생은 나에게 그런 행복을 가져다 준 분이다. 더구나 그가 가톨릭 평신도라는 게 참 좋다. 개신교 목사인 내가 그와 연대하는 건, 가톨릭교회 평신도들과 친밀해지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에겐 넘치는 위트와 재치가 있다. 곁에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훈훈하고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와 더불어 가는 길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얼마를 더 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앞으로 남은 신앙여정을 그와 함께 주~욱 걸어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 지난 22일 수도권예수살기 정기모임이 향린교회 2층 어린이부실에서 박득훈님을 모시고 '기독교 자본주의를 넘어서' 강의가 있었다. 사진은 예수살기 한현실님 제공

독일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식에 프란치스코 교황을 초대하고, 그는 참석할 뜻을 비쳤다니, 더없이 기쁜 일이다. 꿈같은 일이긴 하겠지만 김근수 선생의 염원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이 루터에 대한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할 뿐 아니라, 루터를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신앙의 모범이자 스승으로 모실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하나님의 가슴 한편을 늘 아프게 했던 못이 시원하게 빠져 나가지 않을까?

그는 지난 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지만 자신은 여전히 부자인 교회’가 얼마나 기만적인 존재인가를 예리하게 드러내 주었다. ‘검소하지만 부자인 신부(목사)’에게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그런 신부(목사)는 부자와 권력자 편에 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란다. 교회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려면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자리요 신학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작은교회는 가난한 교회요 저항하는 교회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오늘 한국개신교회가 정말 가슴깊이 새겨 실현해 나가야할 말씀이다. 하나님 안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참 기쁘고 큰 힘이 된다.

이번 글에선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과제를 찾아보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는 경제영역에서 그 동안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돌아보면서 어떤 점에서 개혁되어야 하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난이도가 무척 높은 주제이다. 우선 그 자체로 매우 논쟁적 주제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경제사상과 체제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그런 논쟁적인 주제를 열린 마음으로 논의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한국사회와 교회는 일제의 지배,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치명적 트라우마를 얻었기 때문이다.

먼저 치유 받아야 할 트라우마

지난 3월1일 한기총과 한기연은 세종로사거리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모아놓고 3·1만세운동구국기도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한기총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설교했다. 그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는 반드시 멸망해야한다는 것이었다. https://youtu.be/a4kaWowthbs에서 이영훈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

   
▲ 강사 박득훈님, 사진은 한현실님 제공
나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엔 아직도 치유 받지 못한 깊은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살아 있구나,’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자. 만일 누군가 그런 공개적인 기도회자리에서 ‘예수를 통해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멸망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면 그는 뭐라고 평가할까? 몹시 궁금하다.

영국엔 기독인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문화비평가로 활약하는 테리 이글턴이라는 대학자가 있다. 한국에 소개된 그의 저서 중엔 『신을 옹호하다』와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가 있다.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모멘토, 2009); 황정아 옮김,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길, 2011).

그는 신과 예수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마르크스가 옳았다고 주장하는 흥미롭고 도전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신을 옹호하다』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무신론적이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경건한 태도로 뭐라고 주장하든 간에, 현실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형태와 거기에 내재된 가치관과 신조들은 신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한결같이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인데, 그에 반해 마르크스와 니체는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다.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58쪽.

자본주의나 마르크스나 무신론적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본주의는 해로운 반면 마르크스에게선 배울점이 많다는 뜻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펴는 그리스도인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그것이 한국사회와 교회의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그 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루지 않았는가? 실종자 98만 3천 명까지 포함하면 220만 5천명이나 죽고 죽였다. 게다가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태도 아니다. 작년 말 내 교회 성도가 주관하는 평화콘서트에 참석했다가 인제대 김인철 교수로부터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한 대목에 대해 전해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전쟁의 시작을 강조하는 건 증오 때문이고, 전쟁의 끝을 기억하는 이유는 화해를 위해서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IDkK&articleno=8475451&_bloghome_menu=recenttext

아,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한국전쟁을 굳이 6.25전쟁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거구나! 나도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은 1950년 6월 25일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날인 1953년 7월 27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나의 무의식 세계에도 화해보다는 증오의 영이 더 깊이 새겨져 있는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영국연방국가들과 프랑스·벨기에를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는 매년 11월 11일을 우리의 현충일처럼 지킨다. 가슴에 개양기비 조화를 달고 다니거나 무덤에 바친다. 그런데 그 날은 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이다. 유럽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어언 10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마다 1918년 11월 11일을 기억하며 화해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은 엄밀히 말해 전쟁이 끝난 날이 아니라 당분간 멈춘 날이기 때문이다. 휴전협상만 했을 뿐 종전협상은 한 바가 없다. 우리는 전쟁을 쉬고 있는 셈이다. 적대관계는 여전히 생생하다. 다만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온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적대적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그 동안 경제영역에서 하나님나라의 정의로운 뜻을 펼쳐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자본주의를 엄중히 비판했다가는 여지없이 빨갱이, 용공, 종북좌빨로 몰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까마라 대주교가 남긴 말은 실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줄땐,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 불렀다. 그런데 내가 그들이 왜 가난한가, 따져 물으니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경제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사회에서 믿음으로 꼭 성공해 가능한 한 많이 기부하고 구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체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건 거의 금기사항이 되버렸다.

한국교회는 비극적 역사에서 얻은 치명적 트라우마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거다. 많이 아픈 상태다. 한국교회가 개혁되어 경제영역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이 트라우마에서 우선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소위 ‘기억의 치유’가 필요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불가능과 절망의 벽 앞에서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주님, 이 아픈 땅에 화해와 평화의 성령을 바람처럼 불처럼 보내주실 수는 없을까요? 마틴 루터 킹이나 넬슨 만델라 같은 분을 보내주셔서 남북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을 거라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이자 희망이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통일을 너무 조급하게 바라는 것도 탐욕이 아닐까? 우선 상대체제를 존중하면서 사이좋게 공존하는 법부터 찬찬히 익혀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트라우마가 서서히 치유되고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 자연스럽게 평화통일의 길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런 간절한 마음을 품고, 한국교회가 경제영역에서 걸어온 길을 반성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인 이유

앞서 말한 것처럼 대다수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와 매우 친화적인 길을 걸어왔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2014년 6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낙마한 온누리교회 문창극장로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은 비극적 고난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민족의 게으름을 타파하게 되었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미국을 붙들어 공산화에서 벗어나 자본주의국가가 됨으로써 경제성장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921

그의 주장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비판을 보려면 조석민 외 지음, 『세월호와 역사의 고통에 신학이 답하다』 (대장간, 2014)에 실린 박득훈, ‘세월호 이후의 한국 기독교, 자본주의 극복이 대안이다,’의 105-114쪽을 보라.

한국교회가 경제영역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일단 이런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테리 이글턴이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왜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인지 그 이유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다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그의 평가에 귀기울여보자.

성취와 충족이 패키지로 거래되고 욕망이 관리되며, 정치마저 경영화되고 소비자중심경제가 지배하는 깊이 없는 사회에서는 신학적인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될 가능성조차 거의 없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심오한 정치적·도덕적 토론조차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영적인 향수 달래기에, 아니면 무가치한 세계로부터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데나 이용되지 않겠는가.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58쪽. 번역을 필자가 약간 수정했다.

이글턴의 서술이 너무 압축적이어서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만 잘 벌면 인간으로서의 성취와 충족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선전한다. 인간됨의 가치를 대형마트에서 상품들을 패키지로 묶어 싸게 팔아치우듯, 그렇게 값싸게 만들어버린다. 기업의 생사를 건 광고는 인간의 참된 욕망을 왜곡하고 조정한다. 총량이나 평균으로 표시되는 경제성장만 잘 되게 하면 훌륭한 정치를 하고 있는 거라고 입이 닳도록 칭송한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천박한 소비주의 인생관을 자랑스럽게 널리 널리 퍼뜨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그랬듯이, 사회정의니 경제정의니 하는 건 다 일종의 신기루 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아예 토론의 장에서 추방시켜버린다.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저, 민경국 역, 『법·입법 그리고 자유 II: 사회적 정의의 환상 (자유기업센터, 1997).

이렇게 진지한 정치적·도덕적 토론조차 불가능한 사회에서 어떻게 신학적 문제를 적절하게 제기하고 토론할 수 있겠는가? 설사 하나님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고 뜨겁게 믿는다 한들, 그 하나님은 무의미할 뿐이다. 왜냐면 그 하나님은 기껏해야 자본주의 사회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담당하는 존재로 이미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영혼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신을 향한 향수를 그저 가볍게 달래 줄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 세상은 무가치한 것이니 미련일랑 훌훌 벗어던지고 각자 내세로 탈출하라고 부추기는 존재로 이용된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종교의 자유, 기독교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한들, 그 본질에 있어선 아주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는 거다.

자본주의 정신은 개신교윤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착각

나는 이글턴의 서술이야말로 주류한국사회와 대다수 한국교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한국교회가 기복신앙과 개교회성장주의의 노예로 전락해 말할 수 없이 부패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사회를 마치 기독교적인 경제체제인양 착각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기 때문이다. 거기엔 막스 베버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한국교회의 오독이 한 몫 단단히 했다고 볼 수 있다. 막스 베버 지음, 김덕영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길, 2010).
우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은 무엇인지부터 확인해보자.

인간은 돈을 벌고 취득하는 일에 지배당한다. 이는 그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다. 경제적 취득은 더 이상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앞의 책, 77쪽. 그러나 위의 인용은 나의 번역임을 밝혀둔다.

자본주의 정신은 단지 부에 대한 탐욕이 아니다. 그런 욕망 자체는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부의 축적이 인간적 삶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속적 노력이 미덕으로 칭송되는 순간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럼 베버는 그런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과 개신교윤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자본주의 정신은 … 종교개혁의 어떤 영향의 결과가 아니면 형성될 수 없었다거나,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 개혁이 창조해냈다는 식의 어리석고 공론(空論)적인 명제를 주장하려는 의도는 없다. … 그와는 달리 과연 종교적인 힘이 그 (자본주의) 정신이 질적으로 형성되고 양적으로 세상에 팽창되어 가는 데 과연 역할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랬다면 그 역할이 어는 정도인지,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문화의 어떤 구체적인 양상이 그 종교적인 힘으로부터 유래됐다고 볼 수 있는가를 규명하고 싶은 것뿐이다. 앞의 책, 138쪽. 이 역시 나의 번역이다. 번역문에서 ‘(자본주의)’는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첨부한 것이다.

베버는 종교개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자본주의적 사업조직이 지닌 모종의 중요한 형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만 개신교윤리, 더 정확히 말하자면 17세기 영국청교도 중에서도 성공한 상인그룹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데 일정정도 역할을 한 것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코 개신교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근원적인 원천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을 비롯해 개신교윤리 전체가 자본주의정신과 친화적이라는 위험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베버는 루터를 자본주의 정신과는 무관한 신학자라고 아예 제외시켜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루터는 전통적인 교의에 따라 모든 경제활동의 목표는 이웃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R.H. 토니 지음, 고세훈 옮김,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2015), 172-3쪽.

루터가 지금 살아서 한국교회에 온다면 정말 경악할 것이다. 어떻게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이렇게 자본주의 정신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확산과 관련해선 칼뱅 자신의 신학에 대해선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선 오히려 리처드 토니가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다뤘다. 그는 ‘격렬한 개인주의나 엄정한 기독교사회주의가 모두 칼뱅의 교의로부터 연역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앞의 책, p. 193.

그렇기 때문에 토니는 자본주의가 생성·발전되는 과정에서 전자는 강화되고 후자는 상실된 점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앞의 책, 335-369쪽.

그 현상을 부연설명하자면 개인주의적 요소인 경제적인 미덕 즉 근면, 절제 등만 강조되고, 사회제도들 속에 기독교적 성격이 객관적으로 구현되도록 엄중한 제제를 요청하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사라져 버린 걸 뜻한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종교개혁과 자본주의 역사를 정확히 파악하여 자본주의와 개신교를 마치 쌍둥이 형제인양 일치시켜온 과오를 더 이상 반복해선 안 된다. 한국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사회주의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평등경제를 지향함을 뜻한다.

한국교회가 평등경제를 지향해야 할 신학적·신앙적 이유

그러나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평등경제를 이야기하는 건 매우 불온하고 위험한 일이다. 물론 정치적 평등은 괜찮다. 작년 늦가을에 시작되어 올해 초봄까지 진행된 촛불시민혁명이 광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은 평등한 존재이기에 그 정치적 평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평등을 경제영역으로까지 끌고 가면 이야기가 확 달라진다. 물론 경제적 기회의 평등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소위 흙수저, 금수저 론이 요구하는 바가 바로 기회의 평등 아닌가? 그러나 경제적 지위나 권력의 평등이라든지 경제적 분배의 평등까지 나아가면 즉시 빨간 신호등이 켜진다. ‘어, 이 사람 수상하네.’ 상대의 어두워진 얼굴과 눈에서 소리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평등은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자유와 절대 양립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분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1. 급진적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 여호와(야훼)

그러나 나는 요즘 출애굽 해방역사를 이루시고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 이 땅에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온 몸으로 실천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급진적인 평등경제에 대한 확신이 깊어짐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은 평등경제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분일 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진리에 눈이 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저 높고 화려한 곳에서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짐짓 아랫것들을 위한답시고 구제금이나 하사하곤 양심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부자 권력자 같은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누차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불의한 불평등 경제체제에서 억압과 착취를 당해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 곁으로 바짝 다가가시는 분이시다. 그 분의 귀에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는 그들의 신음소리다. 그 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들은 억압받아 가난한 사람들이다. 언제나 그 분의 마음과 생각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는 바로 불평등체제에 속박당해 고통을 겪는 사회적 약자들이다(출 2:23-25; 3:7, 6:5).

그러니 하나님은 급진적일 수밖에 없으시다. 모세를 불러 급진적인 해방의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런 급진성을 결코 잊지 않도록 그 급진성을 담아낸 하나님의 이름을 새롭게 가르쳐 주신다(출 6:2-8). 그 이름이 바로 히브리어 자음 네 개 즉 YHWH이다. 번역자에 따라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읽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네 글자가 나오면 ‘아도나이’라고 읽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다는 경외심 때문이었다. ‘아도나이’는 우리말로 ‘주님’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할 때마다, 이스라엘 노예들을 바로의 억압체제에서 급진적으로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으로 급진적인 생각을 품기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아직 여호와(야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을 뜻한다할 것이다.

2. 평등경제를 훈련시키는 하나님

단락 2, 3, 4는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에 실린 나의 글, “당신이 말하는 ‘평등’은 성경적인가: ‘노예경제’ 이제 그만, 주님 명한 ‘평등경제’로”에서 인용 혹은 발췌·요약··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9543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광야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한다. 먹거리가 똑 떨어진 거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심각하게 항의했다. 비록 노예경제였지만 이집트 땅에선 먹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니, 차라리 그리로 돌아가 배불리 먹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거리를 기적적으로 공급해주시면서 평등경제를 훈련시키신다(출 16장).

저녁엔 메추라기 고기를 먹거리로 주시고, 다음 날 아침에는 만나라고 불리게 된 빵을 공급해 주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선 만나 분배방식을 제법 상세하게 제시하신다. 첫째, 각 사람은 자기 식구 수대로 한 명에 한 오멜씩 즉 대략 2.2리터씩 거둬야 한다. 둘째, 먹다 남은 것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어선 안 된다. 셋째, 엿샛날에는 다음 날인 안식일 양식까지 고려해서 각자가 먹거리를 두 배 곧 한 사람에 두 오멜씩 거두어야 한다. 안식일엔 양식을 얻기 위하여 들로 나가선 안 된다. 모두 평등경제를 성취하기 위한 원칙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엔 평등경제를 불편하게 생각하여 자기 것을 더 많이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은 가만 놔두면 이런 저런 이유로 평등경제보다는 불평등경제로 기울어지기 마련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인류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단단히 훈련시키신다. 자기 식구 몫보다 더 많이 거둬드린 사람들에게선 그 초과분을 제거하시고, 자기 식구 몫보다 더 적게 거둬드린 경우엔 부족분을 채워주신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꼭 한 오멜씩만 돌아가게 하셨다. 다음 날 까지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겨서 도저히 먹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셨다. 안식일 날까지 만나를 취하러 들에 나간 사람들은 허탕 치게 만드셨다. 들판에 아무런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축적과 불평등을 향한 노력을 철저히 무력화시키셨다. 하나님은 이런 훈련을 무려 광야생활 40년 내내 시키셨다. 평등경제를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읽어내지 않을 수 없다.

3. 다양한 율법에 담긴 평등경제의 정신

하나님은 평등경제의 정신을 만나 분배 뿐 아니라 다양한 경제생활의 영역으로까지 최대한 확대하는 율법을 제정해주셨다. 예컨대 희년규정은 50년 마다 만민의 토지 평등권과 평등한 주거권을 회복시켜준다(레 25:10, 29-31). 금융관련 율법은 빈민 무이자 대부와(레 25:36) 7년 단위의 부채탕감을 명령한다(신 15:1-4, 8). 노동관련 율법은 노동학대나(레 25:39) 임금체벌을 금지함으로써(신 24:14-15; 레 19:13)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준다.

그런가하면 7년(출 21:1-6; 신 15:12-18) 혹은 희년 즉 50년(레 25:44-46) 단위로 노예노동자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단순히 몸만 해방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7년 단위의 경우엔 충분한 재정을 지원해주고, 희년 즉 50년 단위의 경우 원래 소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희년을 선포할 때,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고 명하신다(레 25:10). 여기서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냉혹한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타자의 자의적 의지에 강압당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만 하면 자유를 획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Hayek, The Constitution of Liberty (Lond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76) p. 11.

그러니까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더 이상 주인의 자의적 명령에 억지로 따르지 않아도 되면 그는 이미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그런 자유를 정치철학에선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하나님은 토지의 평등한 사용권 즉 경제적 평등까지 획득해야 비로소 해방된 노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보신다. 그런 경제적 평등을 획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다한들 조만간 실질적인 노예로 다시 전락할게 불본 듯 뻔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을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누릴 수 있게 되는 자유를 정치철학에선 적극적 자유라고 명한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각각의 사회적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희년의 하나님은 가난 때문에 토지사용권을 잃고 노예로 전락한 사람의 자리에서 자유를 판단하신다. 반면에 냉혹한 자본주의 신봉자들은 땅을 잃고 고통을 온 몸으로 겪어 본 경험이 없는 부자의 자리에서 자유를 이해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리와 관점을 열렬히 환영하고 지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경제평등을 주장하면 공산주의자라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그럴 때면 차라리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공산주의자신가 보네!’라고 답하고 싶은 심정이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등경제는 식·의·주에 해당하는 기본적 필요를 평등하게 충족시켜주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적 계층 간 불평등, 소유와 부의 집중현상을 최대한 해소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왕이라도 부를 사적으로 축적해선 안 된다(신 17:17). 부자들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탐욕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제에 인색해서가 아니라,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 때문에 ‘악인’과 동일시된다(사 53: 9). 부의 이기적 축적을 가능케 한 경제체제가 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등경제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펼쳐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충분히 그리고 그 만큼만 누릴 수 있는 경제다(사 65:21-22). 그런 경제를 위해 거대한 생산수단이 필요하다면 그건 개인이 소유해 이득을 취하면 안 되고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가 충족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부와 소유도 늘어나고 있는 한, 계층 간 불평등은 아무리 증대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그것 역시 자본주의가 옹호하는 사회의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상대적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제체제일수록 사실상 절대적 빈곤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 이미 역사적으로 실증된 바 있다. 앤서니 B.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불평등을 넘어: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글항아리, 2015), 43-46쪽.

4. 희년을 선포하고 온 몸으로 실천하신 예수님

평등경제는 구약에 국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도 출애굽의 해방자 하나님, 희년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선언하셨다(막 1:15).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대로(사 61:2) ‘주님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셨다(눅 4:19).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나라는 희년이 상징하는 평등경제를 지향하는 나라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기까지 온 몸으로 희년을 밀어붙이셔서, 인류가 평등경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다. 이 예수를 만나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이 형성한 최초의 교회 즉 에클레시아(민회)는 대안적 정치경제공동체로서 평등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즐겁게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적재산권을 신성한 절대법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소유를 공동체적으로 통용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행 4:32-35). 경제평등의 실현이다.

맺음말

이제 교회가 개혁되어 평등경제를 지향해야 할 신학적·신앙적 이유가 분명해졌다. 문제는 현실세상에서의 실현가능성이다. 결코 도달하기 쉽지 않은 유토피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리처드 토니가 잘 표현했듯이 평등경제를 아직 완벽하게 실현하지 못했다고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불평등이 치열하게 극복되어져야 할 악으로 인식되는 한, 그 사회에 현존하는 불평등은 독침을 읽은 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R.H. Tawney, Equality (George Allen & Unwin, 1952), p. 56.

또한 유토피아를 마음에 품고 살 때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동력을 갖출 수 있다. 한국교회여, 평등경제를 함께 꿈꾸며 힘차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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