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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대신 사람을 위하는 평화
2017년 6월 27일 소성리 현장 아침기도회
2017년 06월 27일 (화) 12:01:26 백창욱 webmaster@eswn.kr

마태 10:34 “칼을 주려고 왔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이 말씀은 뜻밖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이미지와 반대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 일생에 운 적이 딱 두 번 있다. 그 중 한번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운 일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눅 19:41,42) 평화의 자취는 찾을 수 없고, 폭력만 난무하는 예루살렘성의 현재를 보며, 한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 주둔한 로마군대와 헤롯은 조그마한 항거라도 나타나면 무참하게 진압했다. 대표적인 저항세력인 젤롯당은 요인암살이 주목표였다. 지배자가 저항자나 모두 폭력으로 말했다. 예루살렘은 살벌했다. 성안의 사정을 잘 아는 예수는 누구보다도 평화를 갈망했다.

예수의 개인성향도 평화적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마 11:29)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팔복의 세 번째 항목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다. 팔복은 예수님의 성향이기도 하다. 이처럼 예수와 평화는 한 몸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 자신이 평화를 정면 거스른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폭탄선언이다. 칼은 무엇인가? 칼은 베고, 가르는 분열의 상징이다. 예수는 반평화주의자인가? 분열주의자인가? 이 과격한 말씀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조용한 질서를 생각한다. 분쟁이나 싸움없는 상태이다.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조용하다. 독재자의 권력기관들이 시민들을 늘 감시하기 때문에 의사표출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또 집회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 차단하기 때문에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매우 평화롭게 보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가 그랬다. 국정원, 기무사, 경찰, 검찰 등 드러난 권력기관은 사찰, 감시, 도청, 압수수색, 미행, 체포, 연행, 구속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별 연관없어 보이는 기관들까지 독재자를 반대하는 시민들을 배제하는 일에 충성했다. 그런 공포가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조용했다. 또 언제나 그랬듯이 권력의 하수인들이 좋은 나라라고 나팔불었다.

그러나 그런 평화를 평화라 할 수 없다. 가짜 평화이다. 가짜 평화를 깨는 길은 무엇인가? 독재자가 구축한 질서에 금이 가도록 하는 길뿐이다. 바로 칼의 역할이다. 칼은 시민들의 촛불로, 끈질긴 집회와 시위로, 기자회견으로, 장기농성으로, 일인시위로 나타났다. 저항은 허위를 폭로하고 여리고성같은 권력의 아성에 균열을 냈다.

예수 시대 평화는 ‘팍스로마나’였다. 로마는 무력으로 세상을 평정하고 로마의 평화를 강요했다. 거역하면 정복과 죽음이고 순응하면 체제와 목숨을 보장받았다. 로마의 평화중심에는 황제가 있다. 그런 현실에서 예수께 로마의 평화에 장단 맞추라고 할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나라의 평화이다. 황제가 지배하는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평화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우선 칼을 던져서 로마의 평화를 가르는 게 급선무였다. 일명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다. 줄여서 예수운동이다.

분쟁현장에서 평화는 갈등과 투쟁을 피할 수 없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기득권세력과 충돌해야 한다. 그 기득권세력이 강요하는 질서를 거부해야 그 다음 민중들이 원하는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참 평화는 제일 먼저 칼을 수반한다. 예수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칼의 역할을 해야 하는가? 온전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 소성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으로 유지하려는 평화를 거부하고 맞서고 저항해야 한다. 무기평화, 한미동맹평화는 거짓평화, 우상평화이다. 무기 대신 사람을 위하는 평화, 한미동맹 대신 남북화해와 통일, 자주평화로 가자.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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