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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충분히 외롭고 사랑하자 !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마음외
2017년 11월 13일 (월) 18:05:39 양재성 hfmc1004@hanmail.net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나희덕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걸을 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엔 모든 것 다 사랑하고 싶어라

♡♡♡♡♡♡♡♡♡♡♡♡♡♡♡♡♡♡

스치는 인연도 그리운 가을이다
정처 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그건 틀림없이 가을이다

이 가을에 우리
충분히 외롭고 충분히 사랑하자

(1114. 제주도에서 지리산)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마음

곽재구

아침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흙 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 군데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쥔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 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 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

11월 13일, 오늘은
친구 채희동이 귀천 한 지 13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노동자들의 친구인 전태일이
분신으로 시대를 구원한 날이기도 하다

채희동은 걸레질 하는 예수라는 책을 냈다
더러운 곳을 닦는 걸레는
그 더러움을 자신의 몸에 묻힌다
자신의 몸으로 역사의 떼를 닦는다
님이 오시길 고대하며 님의 자리를 닦는다
그렇게 역사의 길을 내고 있다
걸레 같은 사람들이 있어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주저하지 말고 성스러운 걸레가 되자
이 가을에 우리 그렇게 깊어지자

오늘은 친구가 많이 보고 싶다

(1113, 가재울에서 지리산)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빌려줄 몸 한 채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

몸 뿐 아니라 마음도 빌려 준 사람들,
그들 덕분에 인류는 길을 잃지 않고 있다

시인은
생은 빌린 몸으로 살고
누군가를 위해 내 몸을 기꺼이 내어준
희망으로 얻는다는 걸 일깨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자신을 내어 줌으로 자신을 사는 자들이
일상을 거룩하게 한다

(1024, 가재울에서 양재성평화)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불교의 연기론을 말하지 않아도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왜 모르랴
해가 있어야 나무가 있고
나무가 있어야 구름이 있고
구름이 있어야 비가 있고
비가 있어야 사람이 있느니
이렇게 삼라만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깊이 사랑하지 않고서야
이 비밀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사랑에 눈을 뜨면
모두가 떨림인 것을
모두가 뜨거움인 것을.....
내 안에서 이를 알려 주는 자가 누구냐

(1023, 가재울에서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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