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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인가, 사람인가
주일설교문(17. 11. 26)
2017년 11월 27일 (월) 08:52:43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성령강림 후 스물다섯 번째 주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마태 25:31-46 “형제인가, 사람인가”

오늘은 교회력으로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삶의 자리를 지켜 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 해의 끝을 세상의 종말과 연결 지으면서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종말에 행하시는 권세, 그리고 그 앞에 서야 할 인생에 대해 생각하자는 뜻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운동마치고 식사하다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시국이야기를 하다가 한 사람이 “세월호 사고를 그렇게 우려먹더니...” 라고 했습니다. 관점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피곤해서 보통은 듣기만 하는 입장인데, 그 말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좀 전에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은 참사이유를 몰라서 진상규명을 간절히 원하는데 박근혜 정권의 방해로 그동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사회적 참사 특별법이 통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제부터 국회에서 농성하고 있습니다.”라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 뭐 세월호를 이용하는 정치인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변명합니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면 좋은데, 그러질 않으니까 대화가 다른 데로 새고 결론이 잘 안 납니다.

제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당신 말씀에서 느끼는 문제가 뭐냐면, 어떤 현안이 벌어지면, 특히 정권의 잘못으로 막심한 피해자가 생기면 피해자들이 최우선 당사자이고 가장 약자입니다. 그들 관점에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치논리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정치논리도 박근혜를 비호하는 권력의 논리입니다. 한 번도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안타까워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아픔이 있다면, 그렇게 세월호를 폄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논조가 꼭 조선일보 논조입니다. 그러지 마시라.” 고 했습니다.

지역의 동료 목사들을 보면, 사람은 좋습니다. 그런데 시국에 대한 생각이나 말은 딴판입니다. 과연 예수는 어떤 입장인가를 생각하는지 의문입니다. 이렇게 역사정의에 반대하고, 권력에 희생당하는 사회약자를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악한 권력을 편들면서, 교회에서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런 말을 매주 듣는 교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새삼 기성교회의 현실과 정체성에 대해 회의감이 엄습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고 약하지만, 그렇다고 크기 위해서 그런 기성교회처럼 가는 건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 척박한 대구 땅에 새민족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다행히 국회는 같은 날,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사회적 참사 특별법)을 통과했습니다. 이 법에 따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제대로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법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특조위의 권한도 강화해서 조사방해나 비협조자에 대해 제재할 수 있습니다. 신문 사진에서 법이 통과되자 오랜만에 활짝 웃는 유가족 모습을 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 25장 최후심판 비유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서술구조가 매우 단순합니다. 이분법입니다. 뚜렷한 대칭구조입니다. 대칭 구조 안에서 대여섯 가지 다른 표현으로 둘을 구분합니다.

먼저 양의 무리를 보겠습니다.
1. 인자는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그들 중에서 양을 가른다.(32절)
2. 양은 인자의 오른쪽에 선다.(33절)
3. 임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라고 한다.(34절)
4. 이들은 의인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37절)
5.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의인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친절했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이 주님이다.
6.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46절)

이제 반대편을 보겠습니다.
1-1. 인자는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그들 중에서 염소를 가른다.(32절)
2-1. 염소는 인자의 왼쪽에 선다.(33절)
3-1.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4-1.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44절)
5-1.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외면했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주님이다.(45절)
6-1.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간다.(46절)

이 둘, 즉 양과 염소를 대조, 비교해서 차이점을 통해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비교 대조한 서술이 6개입니다. 이 중 1-3, 세 개는 아구가 딱딱 맞습니다. 양과 염소, 오른쪽과 왼쪽, ‘복받은 자들아’ 와 ‘저주받은 자들아’입니다.

그런데 4와 4-1, 5와 5-1, 6과 6-1은 비대칭이다. 어떻게 다른가요?
4는 의인입니다. 아구가 맞으려면 악인이나 죄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4-1은 그냥 ‘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도”(44절). 이 단어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6-1(46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다.
왜 의인의 상대어인 악인이나 죄인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라고 했을까요? 그들은 3인칭 복수입니다. 악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이 다 그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즉 나도 너도 그들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5와 5-1이다. 4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대조절인 4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두 구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 대한 호칭이 다릅니다.
의인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처럼 ‘내 형제자매’라는 가치부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염소인 그들은 ‘여기 이 사람들’을 가치부여하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형제로 보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형제의 일이 내 일입니다. 형제가 당한 일이 내가 당한 일입니다. 형제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형제의 슬픔이 내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냥 사람’으로 보면 어떤가요? 그 사람은 제 3자입니다. 나와 무관합니다. 어떤 일이건 그건 그 사람이 겪는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마음 쓰고 돈쓰고 시간 쓰는 건 무익한 일입니다.

이들의 말과 행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염소무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나요? 어떤 잘못을 했기에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까요?

오늘 말씀에서 제일 강조하는 부분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에 대한 언급입니다. 말씀은 이 여섯 가지 곤궁에 처한 사람의 형편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반복합니다. 보통 문장을 쓸 때는, 다음 문장에서 같은 표현을 할 때는 간단히 통칭하거나, 한 문장으로 축약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똑같은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합니다. 임금이 두 번 말하고(35-36절, 42-43절) 의인이 한 번 말하고(37-39절), 그들이 한 번 말합니다.(44절) 임금과 의인이 하는 말은 문장 형태와 분량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염소무리인 그들이 하는 말은 좀 다릅니다. 의인들의 말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의인들이 굶주린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37절, 띄어쓰기 포함해서 25자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굶주린 사람을 말하는데,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44절, 13자)라고 했습니다. 글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의인들은 굶주리는 사람의 형편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표현도 자세합니다. 반면에 그들은 굶주린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약자의 형편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그들의 상황을 말하는 게 귀찮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합니다.

또 있습니다. 의인들의 말을 보십시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37절) ‘보고’가 5번 나옵니다. 의인들은 각 사람의 곤궁을 일일이 봤습니다.

그러나 염소인 그들의 말에서는 ‘봤다’는 말이 딱 한 번 나옵니다. “보고도”(44절) 여섯 사람의 곤궁을 다 묶어서 단 하나로 처리했습니다. 나머지는 다 생략했습니다. 봤다는 것은 그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말입니다.
염소인 그들은 약자를 보는 일에 무심했습니다. 사실관계와 상황파악에 태만하고 대충했습니다. 그러니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우리가 주변이나 sns에서 보듯이, 어떤 사람은 여기에 덧붙여 권력의 선전나팔에 따라 부화뇌동합니다. 되레 약자를 비난하고, 온갖 못된 말로 상처를 줍니다. 이들의 죄는 무엇인가요?
‘사회 약자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자기 욕망이나, 자기 세계에 갇혀 있거나, 권력 선전에 동조하면서 약자를 형제가 아닌 사람으로 대충 보고, 자기 할 일을 안 한 죄입니다. 그리고는 말로만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 이런 신자가 너무 많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임금입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주관합니다.(32절) 즉 세상은 그리스도의 중요한 통치영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은 의무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에 대해, 목마른 사람에 대해, 나그네로 떠도는 사람에 대해, 헐벗은 사람에 대해, 병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 감옥에 갇힌 사람에 대해, 이들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지 등을 궁구해야 합니다. 특히 역사정의와 권력의 실체에 대해 예민해야 합니다. 왜 권력의 실체를 알아야 하나요? 악한 권력이 굶주리는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로 떠도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수인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문제를 알아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새민족교회도 교회만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일에만 모이는 것은 나머지 날은 세상에 할애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에만 머물러서는 세상을 옳게 섬길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 모든 일에 다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 수준에서, 내 눈과 몸이 가는 범위에서 하면 됩니다. 모든 사람 중 특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약한 이웃을 대할 때, 사람이 아닌 형제자매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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