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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교회의 자리
2018/2/22 촛불총회 설교
2018년 02월 27일 (화) 11:48:25 김기원 kiwon255@hanmail.net

촛불교회 총회가 있었다. 십년에 이른 촛불교회. 교회사명실현의 최전선 선봉의 장이다. 여는 예배설교에 담긴 새로운 다짐은 전부 내게로 향한 것이었다.

2018/2/22 촛불총회 설교
설교제목 : 촛불교회의 자리
설교본문 : 루가복음 4:18-21

1. 사명에 대하여
방금 읽은 복음은 스승 예수님의 출사표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동참하셨다가 홀로 광야수련의 과정을 거치신 후 갈릴래아에서 당신 고유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당신은 그 활동을 공식화하기 위하여 고향을 찾으셨고 당신의 사역에 대해 대외적인 출범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신 그 출사표의 내용은 한마디로 모든 억압적 기제를 부수고 고난받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 해방의 하느님 나라를 일구겠다는 선포였습니다. 루가복음사가가 의도하는 바대로 이 선포에는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과연 당신께서는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 부어 해방의 길을 걸어가셨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바통을 넘겨주셨습니다.
하여 예수께서 우주의 자리로 돌아가신 지금 당신의 출사표에 담아내었고 목숨 바쳐 수행하셨던 그 사명은 오롯이 우리네 그리스도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송하시며 그것을 재삼 확인시켜주신바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든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주라고 보내셨다.(루가 9:1-2)” 제자 파송사의 내용도 색다르지 않지요. 마귀를 제압하고 병자를 고쳐 하느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은 당신의 출사표에 적시된 해방의 사역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일을 행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2. 사명실현에 대하여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일반적인 서술방법으로 정의하자면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되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삶을 본받아 오늘에 구현하고 예수의 꿈을 세세대대로 이어감으로써 그 믿음을 구체화합니다. 예수 꿈의 내용은 오늘 읽은 출사표, 그리고 파송사에 잘 적시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꿈을 이어갈 수 있습니까? 당신께서 보여주셨던 삶의 태도를 톺아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어버이 같은 자비와 사랑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유독 고난 받는 이들을 더 뜨겁게 연민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사랑은 편파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자 당신 사역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국주의의 압제와 강탈, 그리고 정치·종교적 계급 차별과 수탈로 이중삼중고를 겪고 있던 사람들,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때론 정신질환으로 때론 심인성 질병으로 때론 지독한 소외의 고통으로 허덕이던 이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던 원흉을 통쾌하게 들추어내고 당당하게 쫓아내심으로써 치유와 해방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 나라, 곧 태초에 하느님께서 지으신 원초적 창조질서인 상생의 평화와 정의로운 자유를 회복하는 일이었지요.

그분은 죽음을 불사하며 그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분의 뜨거운 연민은 결코 식은 적이 없었고 그분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기조는 결코 빛바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부활생명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당신은 이제 친히 스스로 하느님의 눈물이 되셨노라 말씀하십니다. 가장 미소한 이에게 한 것이 바로 당신께 베푼 사랑이라고 가르치신(마태 25:31-46) 촌철살인의 비유는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격동케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꿈을 이어받기 위하여 지녀야 할 태도와 펼쳐야 할 전술은 자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처럼 하느님의 눈물이 고인 자리를 사역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그 누구보다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억압받고 소외되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 대하여 뜨거운 연민을 품어야 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가장 천하고 버림받은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를 찾아가 만나, 손을 맞잡고 힘을 모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생명의 평화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형태의 악에 맞서 영적 권위로 싸워 제압하여 해방을 선포해야 합니다.

3. 사명실현지가 되어야 할 교회
예수께서는 출사표를 내놓으실 때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현재화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말미의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언제나 ‘현장화’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현장화하는 곳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제도화되고 자기 틀 안에 안주하면서 시나브로 삶의 현장보다 교회 울타리 안의 일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여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교화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여 그 전도된 방향성을 회복하고자 십여 년 전 촛불교회가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촛불교회의 정신은 창립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언은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역사적 현장을 유기하고 단지 개인 심령 속에서만 신앙활동 영역을 찾는 오류를 벗어나 새로운 참여의 영성을 키워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사건의 예배이며 역사의 현장, 고난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예배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제도적 구조를 해체하며 하느님의 눈물이 있는 현장에 ‘올인all-in’할 수는 없습니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감당해야 될 영역도 분명 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모여든 ‘순결한 창녀’들에 대한 목회적 관심과 배려도 필요합니다. 아울러 함께 하느님을 배우고 체험하며 훈련하는 내공수련의 장(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의 일을 이어받아 세상으로 녹아드는 소금이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사명은, 잠시라도 후순위로 밀려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늘 예수사역의 현장성을 담보하려 노력해야 하고, 세상의 악을 제압하고 병을 고치는, 곧 왜곡된 하느님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해방의 사역을 중심과제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4. 촛불교회의 자리
촛불교회는 바로 그런 의지를 모아내는 결정체입니다. 촛불교회는 예수 운동의 선봉에 서 있습니다. 촛불교회는 예수의 길을 걷는 이들이 예수의 심장, 예수의 연민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의 눈물이 있는 자리에 모이는 현장입니다.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고난 받는 이들과 온몸으로 연대하며 악의 권세에 맞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제도교회에게는 늘 신선한 귀감이자 언제라도 동참할 수 있고 동참해내야 하는 최전선이 됩니다. 동시에 가난하고 소외되어 아파하는 이들에게는 함께 어깨 걸고 일어서는 동지적 연대의 힘과 소망이 꽃피는 자리가 됩니다.

지난 십여 년에 이르는 촛불교회의 족적은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본권력에 희생된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의 자리, 제국주의와 분단마피아에 맞서는 자리, 거짓된 권력과 언론에 맞서는 자리, 생태계 파괴에 맞서는 자리 등등 촛불교회의 예배촛불은 매 주마다, 필요한 때마다 하느님의 눈물이 밴 현장을 찾아가 켜졌고, 제도권에 소속되었든 아니든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현장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로 말합니다. 예배는 전례(典禮 liturgia)를 통하여 기억·다짐·성찰·식별·저항·소망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는 공동체적 행위입니다. 예배는 육화하시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으로 인한 변화를 체험하며, 그분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장입니다. 촛불교회는 제도화된 조직이 아니라 바로 그런 장을 만드는 예배운동이자 교회의 사명을 실현하는 최전선의 선봉을 형성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운동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가치와 당위성이 있습니다. 역사의 오메가 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늘 후미지고 소외되고 아픈 곳을 생산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께서 자식들 바라보며 그러하시듯, 하느님의 눈물은 세상 끝날까지 마르지 않을 터입니다.

5. 새로운 결기로
그러니 촛불교회를 일구어내는 동지 여러분, 교회사명 실현의 선봉에 나서서 온갖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예수사역에 대하여, 그리고 촛불교회의 자리에 대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성찰해봅시다. 스승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범과 가르침을 제자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상고해봅시다. 촛불교회 십년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입니다. 우리네 마음도 의지도 소망도 시나브로 흐릿하게 퇴색되었을지 모릅니다.

새롭게 다잡아 봅시다. 스승예수처럼 애끓는 연민으로 무장합시다. 예수처럼 불덩이 가슴을 안고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자리, 해방이 필요한 자리를 찾아 나섭시다. 시절을 막론하고 아픈 자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끝까지 예민하게, 또 담대하게 찾아갑시다.

가서 일구어냅시다. 스승께서 앞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무한신뢰와 하늘나라 향한 흔들림 없는 소망을 무기삼아, 모든 억압의 기제를 부수고 해방의 하느님 나라, 정의로운 평화와 생명의 기쁨을 창출해냅시다.

우리의 스승께서는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려하는 이들에게 이미 모든 악을 제압하는 권세와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것도 예수 사역, 곧 그리스도인의 해방사역을 막아내지 못할 터입니다. 예수께서 출사표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에 젖어 하느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현장화되고 육화됩니다.

그리만 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이 시대에 맺힌 하느님의 눈물이 씻기고, 이 시대에 바라는 하느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살가운 진실과 더 올곧은 정신으로, 더 진한 연민과 사랑의 연대로 걸어 나아갑시다. 지난 십여 년을 그리하셨듯이 주님의 영, 예수의 영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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