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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주일설교문(18. 3. 25) 수난주일
2018년 03월 27일 (화) 10:04:34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마가 15:33-41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역할에서 부족한 게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역사의식이 제일 미진합니다.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게 교인들이 동원되는 구국기도회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주장들을 보면, 지독히 반역사적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과 늘 겹치는 4.3을 기억하며 4.3 역사공부를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주간 즈음에 4.3 사건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우연을 넘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 페북 '4370제주'에서

마침 이번 주 「한겨레 21」은 4.3 70주년 특집호로 나왔습니다. ‘4.3을 말한다’를 ‘사(死). 삶’으로 절묘하게 연결했습니다. 표지 사진은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한 아이가 열심히 젖을 빠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 사진 한 장이 4.3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여러 기획 중에는 ‘4.3을 관광상품화 말라’는 글도 있습니다. 제주도가 4.3 70주년을 관광마케팅으로 써먹는다는 비판이 내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제 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가 열렸습니다. 기념대회를 마치고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하던 중,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발굽에 채여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그냥 지나쳤습니다. 항의하는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가는 순간,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쏘아서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의 지시를 받는 경찰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그날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에 항의하여 도민들은 3월 10일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제주도청, 학교, 은행, 우체국 등 166개 기관 단체, 제주 공무원, 직장인의 95%에 이르는 4만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3.1절 발포가 4.3이라는 커다란 비극으로 가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즈음 1947년 3월 12일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습니다. 이 독트린은 냉전 체제 시작을 공식화하는 선언입니다. 이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임했고, 미군이 제주도 사태에 개입할 논리적 근거가 됐습니다. 미군정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했습니다. 제주도지사를 극우파 외지인으로 바꾸고 우익강화정책을 폈습니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입니다.

   
▲ 페북 '4370제주'에서

대량검거 바람으로 유치장은 미어 터졌습니다. 1947년 3.1 사건 이후 1948년 4.3이 터지기 직전까지 2,500명이 검거됐습니다. 이 와중에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서 김용철이 경찰 고문으로 숨졌고, 3월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양은하가 고문으로 숨졌다. 그렇지 않아도 3.1 사건 이후 도지사의 독단적 행정, 대량 검거 등으로 부글부글 꿇던 민심에 경찰의 잇단 고문치사 사건은 불을 지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350여 명의 무장대는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을 공격했습니다. 경찰과 서청의 제주도민에 대한 폭압적 행동은 봉기의 촉매제 구실을 했습니다. 무장대의 선거 방해로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습니다. (제주는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한 유일한 지역으로 한국현대사에 남았습니다.)

미군정의 강경진압 강도는 갈수록 더 세졌습니다. 미 극동사령부는 진압을 위해 제주도 해상에 구축함을 띄우고, 브라운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했습니다. 브라운 대령은 “(무장대립의) 원인에는 관심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고 했습니다. 5.10 단독선거 후,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이승만정부는 10월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선에서 5키로 이상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이승만은 11월 17일에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고립무원이 된 제주도는 초토화됐습니다. 군경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소개하고 방화 학살을 일삼았습니다. 48년 10월부터 49년 3월까지 5개월여 동안 제주도 곳곳에서 방화와 학살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제주섬은 죽음의 섬이 됐습니다.

미국은 4.3 전개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했습니다. 정부 수립 이전에는 직접 최고지휘관으로 진압작전을 주도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이 토벌을 독려했습니다. 서북청년단도 잔학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체험자들은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제주 4.3은 제주도 경찰국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입산통제 지역인 ‘금족 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4.3이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이유는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왜 우리가 4.3을 잘 몰랐을까요? 그 이유는 역대 독재정권의 탄압 때문입니다. 4.19때 잠깐 진상규명 여론이 빛을 봤지만, 5.16 쿠데타로 긴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제주 4.3의 진실을 최초로 알린 것은 소설 <순이삼촌>입니다. 작가 현기영씨가 유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1978년에 이 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서서히 알려졌고, 90년대 본격화됐습니다. 98년 4.3 50주년을 전후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제주 4.3특별법 제정’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됐습니다. 특별법에 기반하여 2003년 10월 15일 정부가 발행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고, 그 해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사과했습니다.

   
▲ 페북 '4370제주'에서

보고서는 4.3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습니다. 70주년인 올해는 4.3특별법개정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개정안의 주요골자는 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 제주 4.3군사재판을 무효화하고, 생존자를 위한 트라우마 센터 설치 등입니다. 특히 올해 4.3은 추가 진상조사를 통해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역사적 정명(올바른 이름을 찾음)작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자가 생존자에게 물었습니다. “70년 전 일인데, 그 때 기억이 뚜렷한가요?” “기억이라고요? 오늘 일처럼 생생해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한신화할머니의 증언입니다.

“밤에 경찰이 와서 다 불질렀어. 다 탔어. 내 남편, 어망아방. 어디 간지 몰라. 사방팔방 도망갔어.” 할머니는 4살 아들을 안고 서귀포 경찰서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받았다. “가시리 여자 6명, 함께 붙잡혀 갔어. 팔을 뒤로 포승줄 묶었어. 책상 위에 올라갔어. 책상을 탁 쳐서 미니까 대롱대롱 매달렸어. 살려줍소, 살려줍소. 아홉 번을 달아맸어. 바지가 벗겨지고 겨드랑이가 찢어졌어. 할머니의 손가락은 기역자로 꺽여 있었다. 다른 손가락은 굽혀지지 않았다. ”꾀 부린다고 장작으로 후려쳤어. 뒤로 묶인 손을. 손가락 병신 됐어. 그렇게 매맞고 1년형 받았어. 배타고 육지 형무소 갔어. 전주에서 6개월, 대구형무소에서 4개월 살았어.” 죄명이 뭔가요?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것도 몰라.

8살 어린 나이였던 한 증언자는 뒤뜰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경찰이 정문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고 무서워 뒷문 뒤에 숨었습니다. 그곳에서 경찰이 집에 불을 지른 뒤 방안에 있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큰동생(7), 작은동생(5)을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넉 나간 채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경찰이 돌아간 뒤 불길 속에 뛰어들어 애기구덕 안에 있던 막내동생(1)을 꺼냈으나 곧 굶어죽었습니다. 증언자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남편의 입버릇은 내가 열다섯 살만 됐어도...입니다. 남편은 ‘내가 열다섯 살만 됐어도 그 정도의 힘만 있었더라면 주검을 마당으로 끌어내 불에 타는 것을 막았을 텐데...’라고 수시로 중얼거립니다.”

기자는 생존자 취재소감을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가 총살당할 때 맨 앞줄에 서서 박수치고 만세 부를 것을 강요당한 사람들, 굴속에 숨었던 가족들이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들켜 몰살당하는 모습을 요행히 밖에 나왔다가 흐느끼며 바라봤던 사람들, 토벌대가 인근을 지날 때 들킬까 두려워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자기 자식을 숨지게 한 어머니.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혀오는데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고 하니 답답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특히 제주 4.3 시기를 살았던 이들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간직한 이들은 여성들입니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4.3광란의 바람에 휩쓸렸고, 희생당했던 여성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일이지.” “자식들도 몰라야 할 일이지.” 4.3의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몸의 기억, 가족의 안위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던 강제결혼 등,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는 성적유린을 당한 여성들이 입은 상처는 내면의 고통을 겹겹 포갠 채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4.3희생자들이 겹쳐졌습니다. 예수는 만인에게 구세주가 되셨지만 4.3 희생자들은 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를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지만, 제주 4.3에서 미군정한테, 또 제 나라 군대와 경찰에게 떼죽음 당한 제주도민들의 희생은 어떤 뜻이 있나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자기 신앙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제주 4.3 희생자들은 지금도 시신도 못 찾고 진상규명도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2007년 제주공항 1차 발굴결과 수습된 128구의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26구뿐입니다. 사진에는 유해들이 5,6겹으로 쌓여 뒤엉켜 있었습니다.

예수는 죽으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부르짖는데, 4.3 희생자들이야말로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정확히는 지배세력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예수는 당대 지배세력이 죽였습니다. 4.3 희생자들도 당대 지배세력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난주일,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날, 구원의 대상인 무수한 사람들이 폭력에 억울하게 죽임당한 현대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나요?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깔린 현장에 여명이 살짝 보입니다. 오늘 복음말씀 40,41절입니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여자들입니다. 이들은 갈릴리서부터 예수를 섬기던 여자들인데, 예수의 죽임과정을 모두 지켜본 목격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전승도 이 여자들이 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현장을 지킨 최초의 증인들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지배세력의 폭력에 속절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서술하지만, 현장을 지켜본 여자들이 있다는 증언으로 희망을 이어가는 단서를 남깁니다.

4.3을 깊은 고통으로 간직한 여성들이 그날을 오늘에 전했습니다. 그 덕에 비록 70년이 지났지만,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더욱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여성의 증언은 지난날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소중한 씨앗입니다. 이렇게 민중은 당장은 힘없이 죽어나가고 버림받는 대상 같지만, 민중은 늘 되살아납니다. 살아서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전합니다. 헛된 죽음이 아니었음을 꿋꿋이 증언합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듯이, 4.3도 70주년에는 민중의 희망으로 더욱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민중이 되어 예수의 뜻을 이어받아 사람세상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나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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