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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소성리 대첩의 기억
꼬박 열두 시간 걸린 투쟁이었다
2018년 04월 13일 (금) 10:03:53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꼬박 열두 시간 걸린 투쟁이었다.

12일 새벽 2시, 주민과 시민들은 속속 진밭교로 모였다. 대오가 그전 투쟁 때보다는 적었지만 별로 개념치 않았다. 우리는 지도부와 상황실을 믿었다. 그리고 우리 자리에서 우리 할 일을 하면 된다고 다짐했다.

   
▲ 사진은 사드원천무효 공동상황실공보에서

우리는 쇠파이프로 만든 격자 안에 한 사람씩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큰 그물망에 구멍을 뚫고 얼굴만 내밀었다. 그렇게 겹겹이 방어장치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최대한 버틴다는 생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군장비가 결코 순순히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결의였다. 경찰이 소성리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경찰진압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진압개시가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우리는 종교집회와 힘찬 발언으로 계속 투쟁의지를 굳게 세웠다. 전혀 힘든 줄을 몰랐다.

오전이 거의 다 가서 경찰이 진압을 시작했다. 우리 대오 네 귀퉁이로 침입했다. 우리 대오는 모두 격자 안에 있어서 네 귀퉁이를 막을 인력이 부족했지만, 상황실과 연대자들은 최선을 다해 막아냈다. 그전처럼 경찰이 한 사람씩 끄집어 낼 수 있는 상황이 안 됐다. 경찰도 진압이 쉽지 않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우리는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쳤다. “폭력경찰 물러가라”고. 그 구호는 사드를 물리치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간절한 일념이었다.

   
▲ 사진은 사드원천무효 공동상황실공보에서

그 염원이 하늘에 닿았다. 그전 세 번의 전투에서는 졌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이겼다. 퇴각하는 경찰을 보며 우리는 만세를 불렀다. 기어코 이긴 것이다. 단결해서 마음을 뭉치고 몸을 아끼지 않고 투신하니 선한 결과를 얻었다.

전술도 빛났다. 숫자는 적었지만 우리의 일념이 사드귀신을 물리쳤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리고 마음을 뭉치고 단결한 주민과 시민들이 고맙고 또 고맙다. 412 소성리 대첩으로 기억하겠다.

   
▲ 사진은 사드원천무효 공동상황실공보에서

예수살기 소성리진밭교 현장기도회(18. 4. 11)
요한 20:19-20 “제자들은 기뻐하였다”

여러분은 사드철회 투쟁의 최전선 현장에 와 있다. 내일 새벽, 경찰침탈이 예상돼서 긴장상황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덮친 두려움이 소성리 주민과 지킴이들에게도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복음서의 부활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복음서를 쓰는 공동체의 상황을 대입해 놓았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사건 증언만이 전부라면 복음서의 부활증언이 다 똑같아야 한다. 그런데 복음서마다 부활증언 내용이 다 다르다. 그 이유는 자기 공동체의 사정을 끼어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요한복음 부활증언도 마찬가지다. 요한공동체 사정이 곳곳에 담겨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다. 여기서 공동체의 사정은 무엇인가?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이다. 여기 나오는 유대사람은 요한복음의 상황어로서, 지배세력인 바리새를 칭한다. 요한복음을 보면, 바리새가 예수의 적대자로 나온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바리새의 적대자는 요한공동체이다. 성전이 무너지고 나서 성전세력은 소멸하고 회당의 주류인 바리새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권력이 됐다. 바로 요한공동체가 생성하는 시기이다. 그 때 바리새의 탄압에 눌려 있는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두려움을 부활증언에 끼어 넣은 것이다. 예수의 열두제자의 두려움에 자기들이 겪는 두려움을 동일시했다.

20절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도 예수 당시의 제자들 상태라기보다는 후대인 요한공동체에 속한 제자들의 상태이다. 처음 복음서인 마가복음 부활증언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소식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며 당최 믿지 못했다. 그런 제자들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보자마자 알아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은 요한공동체의 부활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제자들이 기뻐하는 원천은 무엇인가? 박해와 탄압에 많은 희생을 겪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가? 방금 전에 그들은 예수의 두 손과 옆구리를 봤다. 두 손과 옆구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흔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쓰라린 흔적을 안은 채 제자들 앞에 현존해 계시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자기들 앞에 딱 있는 것이다.

이 현현체험은 제자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아, 예수께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수난을 당하셨지만, 그대로 끝나지 않고 살아나셨다니! 그렇다면 우리도 능히 예수를 따라 우리를 덮친 고난을 견딜 수 있겠다!” 하는 담대함이다.

지금 우리도 제자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사드철회투쟁으로 한반도평화라는 큰 평화를 지키고, 평범한 일상이라는 소소한 평화를 살아야 하는데, 이곳 소성리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당장 내일 새벽 정권이 자행하려는 침탈에 심난하다. 공권력과 충돌할 때, 심신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분쟁현장에서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집회와 시위 권리는 공염불이다.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의 의무는 ‘개나 줘버려’가 됐다. 오직 공권력의 폭력만이 난무한다. 예수 때의 제자들이나 요한공동체가 느끼는 고단함이 우리에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예수신앙은 늘 시험대에 오른다. 저항이냐 굴종이냐를 강요당한다.

그러나 기뻐하자. 왜 기뻐하는가? 제자들의 기쁨은 무엇인가? 솔직히 공권력의 폭력을 마주하는 현장에서 웃고 즐길 여유는 없다. 그러나 다른 기쁨이 있다. 제국의 폭력에 눌리지 않겠다는 정서다. 시련이 닥치지만, 굴하지 않고 되살아나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년 세 번의 침탈을 견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우리는 그 진리를 담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폭력에 이미 이겼다. 또 부활은 평화로 구체화하고 실현되어야 한다. 평화를 구하는 일은 부활신앙의 증거이다. 평화는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둠을 물리치는 기운이다. 이 기운으로 사드로 신음하는 소성리에도, 분단의 땅 한반도에도, 나의 일상에도 평화를 살자. 평화를 향한 기쁨, 담담한 정서와 의지로 우리의 부활을 증언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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