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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돌려라
7/5 토지강제수용반대 촛불기도회
2018년 07월 07일 (토) 09:38:02 김경호 kim17kh@hanmail.net

성서에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나온다(왕상 21장). 아합왕,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포악한 폭군이다, 그가 자신의 궁전을 확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궁 옆에 나봇이라는 영감이 포도원을 일구면서 살아갔다. 아합 왕은 나봇에게 “ 당신 땅을 내게 파시오. 내가 값을 후하게 쳐주겠오, 아니면 다른데 있는 좋은 땅하고 바꾸어 드리리다.”고 말했다. 폭군의 청(請)치고는 매우 인간적이다. 그러나 나봇은 감히 임금의 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땅을 양도하는 것은 야훼께서 금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 땅을 임금에게 드리면 임금 보다 무서운 하나님께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합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은 결국 나봇을 모함해서 죽였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개들에게 던져 뜯어 먹게 했다. 흔적도 없이 그를 제거하고 그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성경에 나온 토지 강제수용의 명백한 예이다.

   

그후 국가 공권력은 나봇 영감이 야훼 하나님을 모독해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공표했다. 나라가 그렇게 발표하는데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마치 국정원이 “네 남편이 간첩인지 아닌지는 마누라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 국정원만이 안다”고 하는 것과 같다. 평소 나봇의 신앙심을 잘 알던 이웃들도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아는 목숨을 걸고 아합 왕 앞에 섰다. 그는 아합 정권에 의해 블랙리스트 제1호로 등재된 인물이었다. 요단강가에 숨어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던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외친다.

“나봇의 피를 핥던 개가 네 피도 핥을 것이다”

듣는 사람들마저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외침이었다. 마치 마지막을 재촉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잡으려 혈안이 된 왕 앞에 나타나 소리쳤다. 아무도 외치지 못했던 하늘의 음성이 엘리아를 통해서 선포되었다. 국가권력이 토지를 강제수용하면서 벌인 음모가 엘리아의 외침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작지만 그 옛날 엘리야의 외침에 함께 하는 것이다.

저는 구약 성경의 중심은 오경에 있고 그 오경의 중심은 희년법과 함께 선포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 25:23)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땅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사고 팔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힘있는 자들이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 잠시 몸 붙여사는 식객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세상 것들을 소유하는 데 목표를 두고 살아가기도 한다. 물론 소유가 많으면 살아가기 편리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 잠깐 왔다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미가는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미가 2:2)고 비판한다. 그들은 밭에 밭을 더하고 집에 집을 더하고 온 세상 한가운데 혼자 살아갈 듯 행한다.

그동안 건설기업 재벌들이 국가라는 공권력과 손잡고 토지강제수용과 강제집행이라는 권력의 힘을 휘둘렀다. 이 칼은 자기 땅에 몸붙여 사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냈다. 강제 수용시 토지 배상의 기준은 공시지가이다. 누가 여러분의 집을 공시지가를 주고 내놓으라고 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보상이 턱없으니 쫒겨나는 개인은 거대한 공권력을 상대로 몸부림칠 수 밖에 없다. 실제 그 가격을 받아서는 어디에도 비슷한 조건의 땅을 가질 수는 없다. 그냥 쫒겨나다 시피할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거대한 세력과 되지도 않는 싸움을 벌인다. 저항하는 사람은 몸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길거리로 쫒겨나 노숙하고 농성하고 단식하고 첨탑 위로 올라가 몸을 묶는다. 이게 무슨 복지국가인가?

이렇게 공권력을 통해 강제집행해서 얻은 땅의 이익은 모두 기업과 재벌들이 쓸어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모든 개발 이익은 거대 건설사인 재벌의 몫이다. 2017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전현희 의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공시설등을 세운다며 모은 땅 중에 약 400만 평방미터를 지난 7년간 재매각한 사실을 지적했다. 결국 사용하지 않을 땅을 사들이느라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LH는 5조 5400억의 토지를 팔았는데 그들이 개인에게 수용한 가격의 2.5배이다. 이들은 공시지가로 강제 수용하고 팔기는 전국 부동산을 통해서 시가로 팔았다. 이 정도면 공권력이 날강도인 셈이다.

도시의 경우 수용한 곳에 고층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면 개발한 후에는 한평이 30-40배의 가치로 팔리지만 실제 수용당하는 사람에게는 한 평의 가치도 제대로 보상하지 않고 내어 쫒는다. 건설기업이 날로 먹는 셈이다. 주민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고 그 위에 터를 닦고 도시를 세우고 그것을 발전이라고 떠벌인다.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기가 막힌 일이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도 토지강제수용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저지른 것이고 2009년에 용산참사 사건도 토지 강제수용이 빚은 대형참사이다.

1976년에서 2011년 까지 중앙정부가 매입한 공공용지는 5,384 평방킬로미터로 서울시 면적의 9배, 제주도 면적의 3배이다. 2005년까지의 정부가 토지 매입에 지출한 금액이 321조원이다. 기업뿐만이 아니고 정부도 덩달아 토지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박근혜는 2015년 8월에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인 뉴스테이법을 제정했다. 이는 의무 임대보증기간을 10년은 8년으로 5년짜리는 4년으로 줄여 기업이 높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고, 그린벨트를 해제시켜 특혜를 주며, 타인의 재산 수용권한을 민간에게 부여해 주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법은 박근혜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 여야가 모두 함께 통과시켰다.

농민 출신의 예언자인 미가는 도시인들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외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미가 3:2-3)” “너희는 백성을 죽이고서, 그 위에 시온을 세우고, 죄악으로 터를 닦고서, 그 위에 예루살렘을 세웠다.”(미가 3:10) 미가의 리얼한 표현이 오늘 바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현실이다.

성서의 여러 법들의 기본 정신은 그 땅에 몸붙여 사는 사람들의 권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토지를 소중하게 지켜줄 것을 명한다. 남의 땅을 빼앗는자, 땅의 경계석을 함부로 옮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과적으로 남의 생명을 빼앗기 때문이다.

땅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질 때, 풍요로우며 땅은 비로소 생명이 된다. 구약은 그럴 때 정의롭다고 한다. 정의라는 것이 정신적인 이념들이나 영적인 개념들이 아니다. 정의는 어떻게 하면 모든 육체들이 생명의 물적 기초를 골고루 나누는가 하는 문제이며, 온전한 삶을 이루는데 필요불가결한 삶의 근거를 공평하고 평등하게 소유하는가의 문제이다.

땅이 누군가에게 독점되는 것이 불의이다. 공평이 사라진 것이다. 기독교에서 종말이라는 것은 이런 불의한 역사가 끝나고 땅이 악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정의롭고 의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종말은 우주적 파괴를 통해 창조를 말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변혁을 통해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을 파괴하는 것이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 듯이 땅의 소산도 하나님의 것이다. 땅의 소산 또한 모두에게 고르게 나누어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의 핵심이다. 그것은 땅이나 음식 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이 모두의 생명을 풍요롭게 할 때 정의롭다는 것이다. 땅의 소산이 모두의 생명, 심지어는 동물이나 들짐승, 심지어는 식물 자체의 생명의 존엄과 관련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땅의 소산물이 모든 생명을 살리는 본래 역할로 쓰일 때, 땅은 거룩해지고 땅의 소산들도 정결해진다.

   

예수님 시대의 고고학 발굴 자료를 보면 그 시대에 정결례가 가장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유대인의 정체성이 정결례로 표현되었다. 당시의 집들에서는 제의용 욕조, 돌항아리, 돌그릇등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세포리스의 발굴에서 드러났다. 거의 모든 집이 제사장 집으로 오해될 정도로 조금 여유있는 집은 제의용 욕조가 있었다. 가난한 집은 돌항아리나 돌그릇이 집집마다 있었는데 이것은 식기 용도로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그릇들이다. 이 돌그릇들은 정결례에 쓰이는 그릇이다.

구약의 법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며 땅의 고른 분배를 오경의 기초로 삼았다. 이것은 그들 신앙의 근본 문제였다. 또한 땅의 소산은 하나님의 것이라하여 땅에서 나는 산물들이 모든 생명을 위해 고르게 분배되기에 힘썼다. 그것이 복잡한 법전의 내용들 깊은 곳에 숨겨있는 원리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 시대에는 땅이나 땅의 소산에 대한 법들은 숨어버리고 정결례가 모든 법을 대신하는 자리에 섰는가?

그 시대에 땅 이미 로마의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으로는 어찌 할 바가 없었다.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도 지킬 수 없었다. 땅의 소산 역시 로마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정결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었다.

정결예식을 비의 종교에서 행하는 씻김 행위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 오경에 의하면 땅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 땅의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육체적인 생활의 모든 영역 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결 예식이다. 정결예식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날마다 상기시켜주는 매개물이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연결시켜주는 행위였다.

몸을 씻는 행위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자신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이루는 주체라는 것을 바로 자기 안에 새기고 인식하는 행위가 정결예식이다. 그래서 정결예식은 세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예식이다.

히브리어 아담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아담의 여성형 명사가 아다마인데 이것은 땅이라는 뜻이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듯이 인간도 하나님의 것이다. 땅이 모두를 위해 열매를 내면 그 땅에 젖과 기름이 흐르지만 땅이 개인의 욕심을 위해 독점된다면 그 땅이 오염된 것이며 땅이 타락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야할 재화를 일부의 건설사와 재벌의 품에 안기는 개발 논리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길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이 가야할 길도 아니다. 본래 땅과 땅의 소산이 있어야 할 자리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베풀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

정결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몸을 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정결예식은 무엇인가? 내가 행복하다고 하여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의 몸을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한다 하여도 그는 아름답지 않으며 아무리 그의 몸을 깨끗하게 하여도 결코 정결하지 않다.

엘리야는 땅이 한 평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소유로 땅의 소산의 일부라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나봇의 억울한 사연을 풀기위해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되어있는 아합 앞에 섰다. 그가 그래야할 의무는 없었다. 성경의 어떤 법도 그런 의무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왕 앞에 서서 외쳤다. 왜? 엘리아 자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사람들이 엘리아가 다시왔다고 말하던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율법 어느 조항도 그가 마땅히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꼭 해야하는 의무만을 행한다.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한 모든 일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내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다는 것은 모두에게 내가 나누어지는 것을 말하며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구별되는 것이다. 오히려 지저분한 철거현장, 노숙현장, 아픔이 있는 곳에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정결하다.

우리는 촛불혁명을 이루었고 정권을 바꾸었고 지방 정권도 바꾸었다. 그러나 여전히 재벌의 주머니를 불리는 토지 강제수용이 진행되고 평생 살던 터전을 내어 쫒기는 사람들의 눈물이 강을 이룬다. 정권교체는 단지 A가 B로 바뀌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국민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 저마다 복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 뿐인 재산이 헐값으로 수용되고 있고 억울한 호소가 하늘을 떠돈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몰수, 철거, 폭력이 난무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촛불을 들었나? 기업과 재벌 위주의 토지 수용법을 당장 개선해야 한다.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 공적 용도로 쓰겠다면 기꺼이 앞 다투어 바치기를 희망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 어느 누구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 무엇보다 앞서서 문제인 정부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라(레 25:23)

본 글은 지난 7월5일 토지강제수용반대 촛불기도회 설교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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