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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날 때에는
주일설교문, 성령강림 후 일곱 번째 주일
2018년 07월 10일 (화) 09:50:32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8. 7. 8) 성령강림 후 일곱 번째 주일
마가 6:1-13 “길을 떠날 때에는”

지난주에 현대자동차 노동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라는 책인데 부제는 양봉수열사 평전소설입니다. 책 소감문을 나누겠습니다.

   

“양봉수열사는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입니다. 마르샤 신차를 생산라인에 투입하는데, 노사합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가 일방적으로 생산을 강행하자, 저항하다 해고됐습니다. 사실 다른 노조대의원들은 회사가 찔러 준 봉투를 받고 묵인했는데, 양봉수열사만 봉투를 거절하고 노동자 편에 서서 미운 털이 박힌 것입니다.

양봉수열사는 해고 후, 계속 현장조직 활성화를 위해 투쟁하다가 1995년 5월 12일 “민주노조 만들자고, 조합원 곁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외치면서, 분신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13일 숨졌습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불사르며 노동자의 자존감과 권리를 깨우쳤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습니다. 회사와 정권의 집요한 회유 공작, 공권력의 폭력에 번번이 노동자 투쟁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자동차 노조의 권리투쟁은 한 번도 제대로 이긴 적이 없습니다. 시작할 때는 투쟁결의가 뜨거웠지만, 교활한 자본과 정권의 공권력 앞에서 늘 흐지부지되었습니다. 투쟁 때마다 빵빵했던 풍선이 바람 빠지듯 대오가 줄어드는 현상을 반복했습니다.

현실상황에 쉽게 굴복하는 위원장과 조합원들을 보면서, 양봉수 열사는 죽음을 앞두고 노동의 문제를 넘어 인간이 무엇이냐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따르는 패배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투쟁에 앞장 선 노동자가 짊어져야 했습니다. 구속, 수배, 해고, 손배소가 뒤따랐습니다. 노동해방을 외치며 자본과 정권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했던 노동조합은 이제 순한 양이 되어 귀족노조로 변신해 버렸습니다.

귀족노조는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거간꾼으로 변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권력으로 노동자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뜨거웠던 민주노조는 이제 전설이 됐습니다. 사실 민주노조마저도 노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직권조인(노조위원장이 단독으로 회사와 합의하는 것)으로 노동자를 배신해서 어용보다 더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노동자들은 열사가 되어 일찍 세상을 뜨거나, 자본과 정권의 폭력에 깊은 내상을 입어서 겨우 자신을 지탱하거나, 가정이 깨지거나, 여전히 해고자 신분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거나 자본과 노동조합에 환멸을 느끼고 울산을 떠나버렸습니다. 양봉수열사가 자기 몸을 불사르면서 지키고자 했던 노동자의 주체성은 애시당초 사라졌다.

책의 배경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역사이지만 거의 그대로 이 땅 노동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나라의 노동정책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본에 기울어도 되나요? 어느 정권도 친노동정권은 없었습니다. 차라리 독재정권은 그렇다 치고, 믿거니 했던 민주정권이(정확히는 신자유주의 정권) 노동자의 삶을 더 가혹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지금 비정규직, 파견근로, 변형근로 등 노동 조건의 고질적폐들은 모두 김대중, 노무현 때 고정화되었습니다. 그 자식 아니랄까봐 이 정권도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배신감도 더 큽니다. 정말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는 철칙이지만, 노동자가 살 길은 시작도 단결이고, 끝도 단결입니다. 단결이 깨질 때 노동자는 근로자로 전락합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사례는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노동과 자본의 상생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이룰 수 없는 덕목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이윤 추구에만 몰두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노동자들만이라도 각성하고 깨어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하면 다행이지만, 노동자는 늘 각개격파 당합니다. 자본은 돈으로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정권은 공권력 투입이라는 폭력으로 노동자를 굴복시킵니다.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 현실에서 노동자가 어떻게 자기 권리를 확보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자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예수가 고향을 방문한 기사이고, 또 하나는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는데 갖춰야 할 덕목을 말씀합니다. 이 두 이야기도 하나님나라 운동이 현실과 얼마나 부조화하는가를 말해줍니다.

예수가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어찌 보면 금의환향입니다. 율사들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말하고,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이미 고향에도 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참 의아합니다. 왜 그런가요? 단서는 3절입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은 무슨 뜻인가요? 예수가 자기들과 같은 계급이어서 거부감을 준다는 말입니다.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도 예상하지 못한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만 몇몇 병자만 고쳐 주었을 뿐,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이 나왔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4절)

고향사람들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그들도 예외없이 지배자의 폭력과 세금에 눌려 있습니다. 그들도 제 숨 편히 쉬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세상을 열어주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거부합니다. 왜 그런가요?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이 다른 데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중이 주체가 돼서 그 세상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는 같은 민중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민중이 민중을 거부하고 다른 세상을 찾으면 찾아질까요? 노동자가 노동자를 거부하고, 자본이나 권력에게 기대면 노동해방을 이루나요? 어느 날 백마 탄 메시아가 전격적으로 등장해서 자신들을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하나요? 그런 메시아는 없습니다. 있어도 가짜입니다. 그런 메시아가 있으면, 여지없이 민중을 팔아넘깁니다. 수많은 사례가 증명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믿을만한 분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배신을 당했지, 한 번도 민중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예수는 한 번도 민중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십시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나요? 하나님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하나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알아봐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소망을 품고 서로를 믿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먼 데, 높은 데, 일상을 벗어난 데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는 민중들이 있는 곳, 고통당하는 곳, 신음하는 곳에서 항상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나라를 열었습니다. 예수살기 청소년 여름수련회는 프로그램이 기성교회와 완전히 다릅니다. 작년에는 안산 세월호와 서울 위안부 박물관 등을 순례하고 현장소리를 듣고 배웠습니다. 올해는 ‘평화를 걷다’란 주제로 철원 휴전선을 따라 걷습니다. 작년 수련회 때 한 학생의 간증이 화제가 됐습니다. 다른 교회수련회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면, 이번 수련회는 와서 보니 이미 하나님이 계셨다고 고백해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자리에 충만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그분을 환대하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냈습니다. 보내면서 여행길 지침을 주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6:8-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팡이와 신발만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지팡이도 신도 지니지 말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마 10:10) 제자들의 행장에 대해 두 복음서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조점이 다른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완전히 빈손으로 마을에 머무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마가는 “길을 떠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런 극단적인 처세를 말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상과 거리를 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어떤 미련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인연에 매이지 말고, 매달리지도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루나 전대를 가지고 다니면 그 자루에 무언가를 담고 싶어집니다. 집착입니다. 하나님나라 증거보다 부수적인 일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자루나 전대를 채워주는 사람은 이뻐 보이고, 무심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미워집니다. 판단이 생깁니다. 그러다보면 본질이 흐려집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본능적이거나 인간적인 염려나 판단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일절 금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릴 정도로 단호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 예수만을 따라 그분이 명하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나서는, 그 일로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허다한 능력자가 주님이름으로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예수님과 갈라집니다. 능력자들은 능력을 행한 후에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덕을 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세상에서는 고독했습니다. 또한 당신 역시 길 위에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나라에만 충실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과 연이 있었지만, 자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신에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큰 고통과 좌절에 빠지더라도,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배신에 삼킴 당하지 마십시오. 길을 떠나는 사람은 덕 보려고 하지도 않고, 배신에도 다시 털고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정주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어떤 길인가요? 하나님나라 길입니다. 고달프지만 그 길에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영처럼 매이지 않아서 자유합니다. 오직 주님만 신뢰하며 기쁘게 걸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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