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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동일시할 것인가 ?
성령강림 후 열여섯 번째 주일 설교문
2018년 09월 11일 (화) 09:23:53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8. 9. 9) 성령강림 후 열여섯 번째 주일
야고보서 2:1-10 “누구와 동일시할 것인가?”

엊그제 9월 7일은 문재인 정권이 소성리에 나머지 사드를 강제 진입한 지 꼭 일 년 되는 날입니다. 6일 오후, 8천명 경찰이 소성리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7일 밤 0시부터 아침까지 밤새도록 주민과 시민들을 끌어내고 미국놈 사드를 집어넣었습니다. 지금도 그 날의 영상을 보면, 눈물이 나고 분노가 치밉니다. 게다가 기독교천막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정권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종교를 짓밟고도 무사할 것이라 믿는지, 그들의 오만과 무신경이 놀랍습니다.

   
▲ 글쓴이 백창욱님은 대구새민족교회, 대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을 섬기고 있다

사드철회투쟁단체들은 일 년을 맞이하여 9월 6일 오전에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그 자리에서 어제까지 2박 3일 동안 일인시위와 집회를 했습니다. 시위의 목적은 “문재인은 답하라”입니다. 저도 금요일에 청와대 앞에서 백배와 일인시위를 하고 왔습니다. 어제 청와대 집회에서 소성리 할매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습니다. 그 호소문에 우리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문재인 대통령님, 나라일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오. 나는 성주 소성리에 살고 있는 차옥자라고 하오. 나는 해방도 보고 전쟁도 보고 그랬소만 우리 마을에 사드가 들어온 것이 그 중에 제일 험한 일인 것 같소. 박근혜가 성주에 사드를 들여놓는다고 해서, 사드 오지 말라고 날마다 군청 앞에 가서 촛불을 들었소. 그런데 소성리에 사드가 온다고 해서 그 때는 정말로 눈앞이 캄캄했소.

박근혜가 탄핵되던 날 만세를 불렀고, 대통령 선거 때는 사드 빼고 좋은 나라 만들자고 문재인대통령님한테 표를 찍었소. 사드 빼달라고 청와대 앞에도 갔었소.

그런데 어찌 이럴 수가 있소? 강도 같은 미국놈들이 아무리 억압을 해도 그렇지, 촛불로 대통령 만들어준 국민들이 반대해서 못한다고 차일피일 미루기라도 했었어야지, 벌떼같이 경찰들 몰고 와서 늙은이들 끌어내고 젊은이들 짓밟고 저 애물단지 사드를 또 밀어 넣었소. 거기에 앞장섰던 대통령님이나 그날 왔던 경찰들, 공사 장비 들어간다고 또 주민들 끌어내던 경찰들, 공사 인부 들어간다고 날마다 길 터주는 경찰들 모두 미국놈들에게 우리 땅 넘겨주는 부역자가 되었소. 그리고 1년이 지났소. 이제 어쩔 참이요? 저 땅이 저대로 미국놈 차지가 되도록 내버려둘 참이요?

우리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소. 마을의 재액을 면하려고 이무기에게 여자애를 잡아서 바쳤다는데 아무래도 소성리가 그 여자애 짝이 난 것 같소. 그렇다고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요. 또 다른 마을이 우리 마을 짝이 나지 않도록, 내 손으로 뽑은 우리 대통령이 강도 같은 미국놈들 손에 놀아나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나가서 싸울거요. 우리는 기왕에 사드 나가는 것 보고 죽겠다고 맹세를 했소. 문재인 대통령님, 제발 마음 단단히 잡숫고 사드 꼭 좀 빼 주시요.

그동안 소성리는 총 여섯 번이나 대규모 경찰과 맞부딪혔습니다. 그 중 작년 4월 26일, 처음 사드가 들어갈 때만 박근혜가 탄핵당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모두 문재인 정권이 자행하였습니다. 사드배치에 박근혜 핑계를 대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과 행실이 다른 정권도 보기 드뭅니다.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문재인 지지자들의 반응입니다. 같이 촛불을 들고 같이 박근혜를 추방하고 같이 문재인을 선출한 시민들인데, 그래서 문재인이 자신을 뽑아준 시민을 공권력 폭력으로 짓밟은 일에 대해 같이 분노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그들은 같이 분노하기는커녕, 문재인을 옹호했습니다. 사드배치 말고 대안이 있냐?고, 큰 틀에서 이해하자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문재인지지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공권력 폭력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겪은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사자로서 직접 폭력을 겪으면 정치나 이념보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우선 인식할텐데, 분쟁현장에 대한 참여는 없고 말만 하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정치논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재인대통령이 국가 기념일 때 하는 연설도 처음에는 감동을 주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냥 연설의 한 양식에 불과하다는 인상입니다. 행동으로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좋은 말은 모든 독재자들도 똑같이 합니다.

오늘 성서말씀에서 야고보사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교훈이 아주 실질적입니다. 당시 교회에서 사람 차별하는 풍토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사도는 구체적인 실례를 말합니다. 어쩌면 이천년이 지난 오늘 교회풍토와 그리도 같은지 놀라울 뿐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의 태도가 부자를 대할 때와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에 다른 것을 꾸짖습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유력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입니다. 필요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신경 안 씁니다. 그가 교회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라는 말에서 그들의 위선과 이중적 태도가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부자에게는 친절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냉정한가요? 사람들이 부자를 동경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송 신문 등 대중매체들이 하는 본연의 목적이 있습니다. 서민대중의 의식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서민대중이 기득권 세력에게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세뇌역할을 합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자본가 기업들은 매체에 광고와 협찬으로 돈을 쏟아 붓습니다. 돈을 받아먹는 방송종사자들은 자본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충실하게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노동자서민대중이 부자들을 거부하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부자들에게 고분고분 순응하도록 하는 일에 방송역량을 집중합니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의 철칙이 있습니다. 계급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민족정서를 자극해서 동포애를 일으키고, 인간애, 보편성,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프로그램들은 잘 만듭니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또 다른 한 축인, 더 근본적인 원인인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접근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층이 계급문제를 다루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 자본가들은 할 수 있는 한 자기들만 지속가능한 세계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본가들만 좋은 세상이지만, 그렇게 사회를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인식인양 스며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자기들 편을 들지 않는 부자정당에 투표하는 것이고, 노동자서민대중이 자기들 이익을 결코 대변하지 않는 권력의 정책이나 주장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방송매체가 성공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대중이 자신을 부자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부자를 동경하고 부자가 되지 못해서 한이 됩니다. 부자를 비판공격하면 마치 자기가 공격당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런 현상을 누가 좋아할까요? 진짜 부자들이 좋아합니다. 자신들의 작전이 먹혀들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부자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부, 욕망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매우 강렬하게. 이 질서에 도전하거나 흔드는 세력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단합니다. 우리 사회 법과 제도,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싹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정권은 노동현안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문제의 경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긴 세월 흘러 보내는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 것을 내주기는 죽어도 싫기에 노동자가 지쳐서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사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면,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제일 우선 할 일은 한국사회 계급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할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은 현실이 있습니다. 슬프고 안타깝게도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에 첨병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담론들의 결론은 내가 복 받고 성공하는 데 있습니다. 보통 사람도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격려합니다. 실패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게을러서 가난한가요? 아닙니다. 새벽 버스 첫차에 누가 탑니까?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합니다. 그러나 계급차별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통사람들의 노력과 분투가 평등사회를 세우기보다는 자본주의에 더 기여합니다. 무엇을 탁월하게 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 일이 과연 세상을 좋아지게 하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본주의만 더 튼튼해집니다.

야고보사도는 사람들이 잘 보이려고 애쓰는 부자들이 사실은 한편이 아니고 적대자라고 합니다. 부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오늘 설교자의 문제는 해석자가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서 성경이 말하는 계급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6절) 야고보사도가 이 말을 할 때의 어조나 말투는 매우 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멍충아!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눈을 뜨라고 일갈했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민중인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우리 계급에 충실하게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한편이어야 합니다. 사도는 부자들을 향한 관심과 친절을 가난한 사람에게 돌리라고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약 2:5) 가난한 사람은 복이고 은총입니다.

만석동이라고 인천에서도 매우 가난한 동네가 있습니다. 어제 한겨레신문 토요판에서 그곳에서 30년 동안 마을과 동거동락한 공부방을 취재했습니다. ‘기차길옆작은학교’입니다. 거기에 나온 내용입니다. “공부방 이모삼촌들은 아픔이 있는 자리로 아이들을 자주 데려갔습니다. 6월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중의 분향소는 세 차례 찾았습니다. 용산참사 현장과 제주 강정마을, 파인텍 고공농성장에선 아이들과 공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모습들이 “아이들이 만날 진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방에선 대통령, 판·검사, 의사,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이 돼도 너희 가난은 그대로일 것’이라며 섭섭할 만큼 단호하게 말합니다. “미래를 부정하지 않고, 내가 누구며, 어디에 서 있고, 스스로 지켜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아이들이 이 세계와 대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을 보는 정확한 인식에 감탄이 나옵니다. 교회도 감히 바로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진실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가르칩니다. 이 공부방 이야기를 접하니, 우리가 진정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원한다면, 성적 지상주의인 학교 교육을 벗어나야 한다는 절실함이 더욱 간절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가는 직업이 사법부인데, 과연 그들이 사람 세상에 기여합니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우병우가 되든지 박보영이 됩니다. 탈렌트 박보영이 아니라 대법관했다가 일선판사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대법관이 일선판사가 됐다고 미담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혹을 일으킨 판결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일심, 이심에서 승소한 정리해고무효소송을 기각하고 회사쪽 손을 들어줬습니다. 박보영의 판결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죽음 행렬을 부추겼습니다. 과거사 손해배상 청구사건도 기각해서 희생자와 유족들을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공부 잘하는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충실한 마름이 될 뿐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사는가? 세상에 등불이 되고 사람에게 희망이 되는가? 세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말이 필요 없게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긴급처방이 있습니다. 가난을 지향해야 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럼, 세상이 조금 믿어줄 것입니다. 세상의 인정 이전에 주님이 가장 기뻐할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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