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논평 환경/기술 지역/농업 전통/문화 미디어/사람 정보/게시판
  편집: 2018.11.16 금 09:47
> 뉴스 > 시사/논평 > 칼럼 | 종교영성
     
겉옷을 벗어 던지고
성령강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종교개혁주일
2018년 10월 29일 (월) 15:55:48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8. 10. 28) 성령강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종교개혁주일
마가 10:46-52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봤습니다. 영어 제목은 “The Light Between Oceans”(바다사이 등대)입니다. 영어제목이 훨 낫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다가 잠이 싹 달아났고, 나중에는 주인공의 처지가 너무 딱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톰’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사람들을 피해 외딴 섬의 등대지기가 됩니다. 그 곳에서 만난 ‘이자벨’과 사랑하고 혼인하여, 오직 둘만의 섬에서 행복한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부부의 행복은 첫 아이를 낳으면서 큰 슬픔으로 바뀝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 톰은 등대로 출근해서 밤을 지내는 사이, 이자벨은 해산기를 느낍니다. 아이가 나오려고 하자 이자벨은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 필사적으로 톰이 있는 등대로 갑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데 바람소리가 워낙 세서 톰은 이자벨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서 퇴근하려고 등대 문을 열자, 이자벨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합니다. 그렇게 첫 아이를 잃습니다. 비탄에 잠긴 이자벨은 이년 후 두 번째 아이를 가졌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너무 일찍 나와서 유산합니다. 그렇게 어린 생명을 두 번이나 잃고 이자벨은 아이 무덤에서 날을 지샙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톰은 파도에 떠내려온 보트 안에서 남자의 시신과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자벨은 아기에게 흠뻑 빠집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톰은 등대지기의 임무대로 보트사건을 보고해야 하는데 이자벨이 톰을 가로막습니다.

여러분이 이 부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기에 대해 너무나 간절한 이자벨을 보고 톰은 보고를 단념합니다. 남자의 시신은 땅에 깊이 묻고 보트는 망망대해로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기 무덤에 꽂아둔 묘비를 뽑아 버립니다. 보트에서 건진 아기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둘째 루시가 됩니다. 톰과 이자벨은 두 아기를 잃은 슬픔을 잊고 아기 루시와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수년 후 육지에서 열린 등대 행사에서 파도에 떠밀려온 보트사건의 실상을 알게 됩니다. 가까운 동네에 실종된 남자와 아기 그레이스의 친엄마 ‘한나’가 살고 있는 겁니다. 한나 역시 남편과 아기를 잃고 나서 깊은 슬픔에 잠겨 세월을 보냅니다. 그 모습을 본 톰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립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돼, 계속 덮어둘 순 없어. 이건 옳지 않아”.

그러나 이자벨은 모른 척 지내자고 합니다. 톰은 아기를 발견할 때 있던 딸랑이를 한나 집 우편함에 몰래 넣고 갑니다. 아이를 찾으라고 스스로 단서를 준 겁니다. 한나는 딸랑이를 경찰에 제보하고 경찰은 본격 수사에 들어갑니다.

큰 부자인 한나의 친정아버지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딸랑이 관련 제보자를 찾고, 톰의 집에서 딸랑이를 본 톰의 친구는 돈욕심에 몰래 경찰에 신고합니다. 급기야 경찰은 섬에 들어가 톰과 이자벨을 심문합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한 톰은 모든 것을 자신이 했다고 자백합니다.

그런데 경찰은 아기 그레이스의 친아버지도 톰이 죽였다고 덮어씌우고 살인죄로 기소합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한나의 탄원으로 톰과 이자벨은 짧은 옥살이 후 풀려나지만 그레이스 루시와는 영영 이별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이자벨은 세상을 떠나고 톰은 혼자가 됩니다. 이 때 애엄마가 된 그레이스 루시가 아기를 데리고 톰을 찾아옵니다.

톰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이자벨이 미리 써 놓은 편지를 전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듬뿍 전하는 편지입니다. 그레이스 루시는 이제 앞으로 계속 와도 되냐고 말하자, 톰은 더할 나위 없이 기다리던 말이라고 좋아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톰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딸을 배웅하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현실에 묻히지 않고 양심의 소리에 예민하게 응답하는 톰의 모습이 감동의 여운을 줍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행복한 가정과 자기 지위를 스스로 박찬 댓가로 혹독한 고난을 겪지만, 결국 그레이스 루시가 다시 톰을 찾아와서 아빠와 딸의 관계를 맺는 게 보기 좋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돼, 계속 덮어둘 순 없어. 이건 옳지 않아”. 이 대사가 제 가슴에도 울림을 주었습니다.

금요일에는 민중당 대구시당에서 하는 정치아카데미에 갔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에서 일하는 이정찬씨가 “대구 어디까지 알아봤노?” ‘역사 속 대구, 대구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을 소개하자면, 대구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한 지명들이 많습니다. 팔공산, 파군재, 해안, 반야월, 안심, 무태, 지묘동, 불로동 등 입니다. 왕건이 대구 공산 전쟁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크게 패해서 도망칠 때, 목숨이 위태롭거나, 위기에서 벗어난 사연들이 지명이 됐습니다. 예를 들면, 견훤에게 쫓겨서 지금 반야월에 이르렀는데, 때는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 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 됐고, 이곳에 와서 겨우 안심해서 안심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팔공산도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장수 8명이 순절해서 팔공산이 됐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대구는 왕건의 고려 건국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건 맛보기고 진짜 본론은 일제 식민지시절 대구의 독립투사 이야기입니다. <김일식 일가를 통해 본 항쟁도시 대구>라는 주제로 김일식의 삼대가 어떻게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웠나를 들었습니다. 김일식의 할아버지 형제인 김진만 김진우는 군자금을 마련해서 임시정부로 보내기 위해 친일파 매국노인 장인 집을 털다가 잡혀서 십년 징역을 살고, 아버지 김영우형제는 친일분자를 암살하는 데 쓰는 폭탄범으로 잡혀서 징역을 삽니다. 김일식 김이식형제도 똑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들의 투쟁활동은 일제 경찰 심문조서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 입구에 김일식 일가 삼대의 이름을 새긴 큰 바위가 있습니다. 어느 의인이 이들의 이름이라도 기억해 두자는 마음으로 새긴 것입니다. 저는 대구 시월항쟁 이후의 지식밖에 없었는데 이 강연을 통해 일제 때의 조직된 활동이 시월항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 때 노동자조직이 농민회와 교류하고, 적색노조 활동이 기반이 돼서 해방 후 시월항쟁으로 진보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자주 한 말,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대구에서는 식민지시절부터 줄기차게 있었던 것입니다. 독립투사들 이야기를 들으니, 심하게 왜곡된 대구를 다시 원래의 대구로 돌리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대구새민족교회도 그 중 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줄거리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께 고침받아 눈을 뜨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치유이적이나 눈을 뜨게 한 사건은 이미 앞에도 있습니다. 마가 1-3장까지 예수님의 치유이적이 다 모여 있습니다. 또 마가 8:22 이하에도,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눈먼 사람 치유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 복음말씀에는 앞의 치유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눈먼 거지의 이름이 나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이름 등장은 이 사람에게 주목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보여준 남다른 태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심난합니다. 당신이 세 차례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했지만, 제자들은 전혀 그 말뜻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서도 제자들의 망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들 모두 자리욕심에 들떠있습니다. 자신들의 예루살렘 행을 권력쟁취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자리청탁을 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뒤늦게 이를 알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했습니다. 열 명은 추궁하고 두 명은 방어하고 그러다가 지난 일까지 끄집어내고, 감정상하고 말싸움이 나고 고성이 오고가고 그랬을 것입니다.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몸싸움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옆에서 가만히 이 모습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예루살렘이 코앞에 있는데 우리 전열은 오합지졸이니 이를 어떡하나... 이대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큰일입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고사하고 조직이 한 순간에 무너지겠다는 위기를 충분히 느꼈을 것입니다.

분위기 쇄신이 절실합니다. 이 때 등장한 새 인물이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의 남다른 태도는 무엇인가요? 그는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자 인생을 걸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외치는 말도 똑같습니다. 그만큼 절실하고 흔들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행동도 일말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자기를 부른다는 소리를 듣자,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습니다. 거지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전 재산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그러나 미련 없다는 듯이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디매오가 동냥하는 자리는 사람왕래가 많은 좋은 자리입니다. 거기 그냥 죽치고 앉아 있으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용기있게 과감하게 겉옷도, 자리도 박차고 일어나서 예수께로 온 것입니다. 예수는 바디매오를 보자, 소원을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은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자기 소원을 한 치도 어긋남없이 정확하게 구하는 것도 그 사람의 그릇입니다. 그리고 눈을 뜬 바디매오는 자발적으로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바디매오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없이 눈 뜨기를 고대했습니다. 이 자리를 박차고 다른 세상 살기를 염원했습니다. 그 소원이 쌓이고 쌓여서 그의 골수에 박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소원을 묻자, 한 치도 망설임없이 정확하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눈먼 사람이 보기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누구에게나 당연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눌리고 왜곡된 세월일지라도 오래 되면, 그 생활습속이 정상인 줄 알아서 그냥 그대로 사는 사람이 천지입니다. 그게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의 욕망이 민중을 호리는 교설을 만들어서 면죄부를 파는, 교회 이름으로 사기 치는 지경까지 왔습ㄴ다. 한국 개신교는 여지껏 이런 내용으로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개신교는 가톨릭이 중세 때 해왔던 혹세무민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 개신교는 가톨릭을 팔아서 종교개혁을 말하기도 민망한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주류교단은 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고뇌하기보다는 기존질서 유지하기에 바쁩니다. 권력에 빌붙고 약자 혐오로 자신의 명맥을 유지합니다. 위안을 삼는다면,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도 불교도 다같이 타락한 상태라서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교회만 문제는 아닙니다. 분단을 산 게 70년 세월이 넘어 버리자 분단이 당연한 현실이 돼 버렸습니다. 남북이 분단을 극복하고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통일되면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냐고, 지금 우리 살 길이 급한데 북한 동포 돌아볼 여가가 어디 있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이제 북한도 한국이 밀이나 쌀 보내주는 거 옛날처럼 절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도 조국통일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 실정 모른다고, 북한을 어떻게 믿느냐고, 현실감 없다고 성을 냅니다. 이제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서 주권국가로서 자주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 미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나라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되게 역성입니다. 당장 코 앞의 안전이 인생에서, 역사에서 얼마나 큰 패착이 되는 줄 모릅니다.

자기 가정 파탄을 감수하고 양심을 좇은 톰, 일제 암흑기에도 극소수이지만 조국독립을 위해 자신을 던진 독립투사들, 그래서 후세를 부끄럽지 않게 한 선조들. 이들은 바디매오처럼 눈을 뜨기 위해, 의와 진실을 좇기 위해 겉옷을 벗어 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눈먼 거지는 바디매오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눈먼 거지입니다. 세상이 온통 깜깜하면 그 안에 사는 모두가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눈을 뜨기 위해, 주님을 만나 새 사람, 새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도 겉옷을 던져 버리고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백창욱의 다른기사 보기  
ⓒ 새마갈노(http://www.eswn.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나비고기야 나비고기야
망사차림의 처녀
영적인 안내자인 자연을 만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친환경 재생지로 만든 교회달력
겉옷을 벗어 던지고
감사는 곧 사랑입니다
오늘이 언제나 나의 마지막
정원 숲 신학을 시작하며
마지막 때가 올 것도 없다
내 직업 내가 만든다
인류, '호모 데우스'를 꿈꾸다
로컬미식라이프, '배려의 식탁' ...
한국교회 지붕 햇빛발전소 설치를 ...
9월 3일(월) 오후2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교...
신재생에너지로 90% 전력공급 가...
독자 설계 잠수함 건조
포천 평화나무농장 생명역동농업 산...
온생명살림 기행팀과 함께 평화나무 농장을 방문한 내용을 정리하...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
'호국대성사 서산대제'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384-19, 성도빌딩 5층 | 전화 : 02-747-3191 | 편집인 010-8413-1415 | 제호 : 새마갈노
등록번호 : 서울 아03061 | 등록일 2014.03.24 | 발행인 : 양재성 | 편집인 : 류기석 | 청소년보호책임자 : 류기석
Copyright 2009 새마갈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sw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