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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대림절의 자리
예수님 기다리는 사람 이미 예수님의 사람
2018년 12월 03일 (월) 16:50:19 양재성 hfmc1004@hanmail.net

기다림, 대림절의 자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 9~13절. 누가복음 21장 25~36절

◾ 대림절의 은총
오늘부터 교회절기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대강절, 강림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대림 절기는 기다림의 시간이며 대망과 침묵의 시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에 모든 사람이 제 숨을 쉬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갈망하며 우리를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2018년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한반도의 정황에 기대가 큽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꽉 막혔던 한반도가 숨통이 트이고 있습니다.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일촉즉발의 위험에서 한반도를 평화로 나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그 고난에 함께 하였던 것처럼 오랜만에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기회를 실현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마음 모아 기도합시다.

   

◾ 남북 철길 연결의 대장정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남북한 철도 연결을 위한 공동조사를 할 남측 열차가 30일 오전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서울역에서 출발, 도라산역에서 환송 행사를 마친 뒤 북녘땅을 향해 기적을 울리며 군사분계선(MDL)을 넘었습니다. 남측 도라산역과 북측 판문역을 주 5회 오가던 화물열차가 2008년 11월28일 운행이 중단된 지 꼭 10년 만에 남북 철도가 다시 이어진 것입니다. 앞으로 보름 남짓 남북의 철도 전문가들은 북측 기관차가 이끄는 열차에 함께 타고 경의선 개성∼신의주 약 400㎞ 구간과 동해선 금강산∼두만강 약 800㎞ 구간 등 총 2600여㎞에 이르는 북한 철로를 누비며 조사합니다. 특히 남측 열차가 동해선을 통해 두만강까지 운행하는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에 힘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날짜도 13~14일로 예정했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주춤했던 남북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정상 괘도에 올라 평화적 통일을 향한 대장정에 차질 없이 진행되길 소망합니다.

◾ 기다림과 깨어있음
오늘 성서일과는 누가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21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징조가 있고 땅과 바다에서도 징조가 있습니다. 오늘날 하늘은 시커멓게 미세먼지로 가득하고 바다는 플라스틱으로 가득하며 땅은 쓰레기로 가득합니다. 이미 새로운 징조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도적같이 올 것이며 이는 땅에 심판을 집행할 것이기에 두렵고 무서운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란 말씀은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인식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물론 인간과 만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기도 합니다. 인식의 전환은 삶의 방식의 전환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결국 예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운명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삶에 늘 우리를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성공회 신부인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을 따라 걸으며 인식의 전환을 요구할 것입니다. 전통 신앙방식이 얼마나 하나님의 신비를 왜곡시켰는지를 보며 창조의 신비를 경축하고자 합니다.

◾ 환경위기와 그 임계점
지난 5월, 태국에서 발견된 고래사체에서 비닐봉지 80개가 나온 것에 이어 11월 인도네시아 해안가에서 발견된 고래 사체에서 플라스틱병(4개), 비닐봉지, 플라스틱 컵(115개)이 나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해마다 1천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유입되고 있으며 한반도 크기 7배에 달하는 쓰레기 섬이 만들어져 바다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지구 생태계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는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환경파괴는 급기야 창조질서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지구생태계 전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구온난화 해결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지구멸망도 가능하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재앙을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미 광범위한 문명의 쇠퇴를 막을 수 있는 시점은 지났고, 남은 것은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재건을 위한 기반을 얼마나 남기냐는 싸움뿐입니다. 기후변화로 30년 안에 토양과 물이 고갈돼 인류에게 충분한 식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존 캅)

미국의 신학자 존 캅 교수는 70년대 이미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폐해를 간파하고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인류가 살 길은 생태적 회심과 삶의 방식의 대전환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처럼 이미 지구 생태계 붕괴의 임계점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때에 매튜 폭스 신부는 인류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창조성과 계시
“예수는 신적이기 때문에 고통과 기쁨을 함께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을 함께 했기 때문에 신적이었습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자비의 자녀라고 가르쳤으며 그들이 자비롭다면 그들도 신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성-자비의 힘)

폭스 신부는 자비란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태어난 생활방식이라며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창조주가 같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자비를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에너지와 우주의 에너지를 합하여 정의를 수행함으로 동료 피조물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만물과 경축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비는 우리가 우주를 만든 창조주와 맺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대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혹은 선이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자비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때 하느님은 비로소 하느님이 되십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로마서 저자는 모든 피조물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계시사건과도 같습니다.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정,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를 창조성이라 주장하였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창조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해가 뜨고 지는 곳에서 옵니다. 온 우주는 창조성으로 가득하며 매 순간 새로운 것을 낳습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 안에 예수를 잉태하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예수를 낳지 않는다면 2000년 전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창조적이며, 창조능력이 있습니다. 창조성, 즉 거룩한 상상력을 통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습니다. 다시 아름답고, 건강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다른 세상 말입니다.” (매튜 폭스)

◾ 창조영성
폭스 신부는 창조 영성은 가장 오래된 영성이며, 온 우주에 가득하고 우리 일상 모든 것에서 발견된다면서, 창조성은 바로 생명의 움직임이며, 창조하는 매 순간 우리는 성령과 만나고, 성령의 도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 매 순간 우주를 새롭게 창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폭스 신부는 지구상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매 순간 복음을 새롭게 써야 한다면서 우리는 모두 예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낳는 모든 것은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창조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특히 교육과 경제 분야에서 더욱 그렇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창조성이 잘 못 사용되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했습니다.

“폭스 신부는 정의와 자비, 치유가 없는 창조성은 열대우림을 파괴할 수 있고, 가스실을 만들어 사람을 희생시키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안의 창조성은 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라는 가치를 통해 비판받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폭스 신부의 강연 중에서)

폭스 신부는 이렇듯 창조성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것으로 근본주의와 가부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파괴적 힘은 가부장적이어서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신의 모성성에서 나오는 창조성은 정의와 자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축복이 됩니다. 이런 창조성은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생명까지 위하게 됩니다. 폭스 신부는 창조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원죄론 위주의 교회를 ‘우주적 그리스도’의 창조적 교회로 변화시켜야 함을 역설하는 개혁가입니다. 폭스 신부의 신학적 작업은 그의 이력만큼이나 특이합니다. 그는 1940년에 태어나 가톨릭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의 신부로서 34년 동안 지냈으나 그의 진보개혁적인 성향으로 교황청의 침묵명령을 받았지만 창조영성에 침묵할 수 없어 교황청의 명령을 거역하였다고 종교재판에 회부돼 결국 1995년 사제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 이후 성공회로 이적하였으며, 문화와 창조영성 연구소를 창설하여 예술과 영성의 통합, 타종교 및 현대과학의 대화 등의 전위적인 시도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기독교 내부에서의 해방신학과 여성해방운동, 기독교 밖에서의 현대과학과 종교다원주의 등의 도전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영역에서 신학화 작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폭스 신부의 관심은 지구 생태계 즉 어머니인 땅과 땅에 속한 어머니의 자녀들인 만물이 직면한 위기를 이웃 생명들과 더불어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스런 소비로 지구 이곳저곳이 붕괴되고 있고 심지어는 생명의 기반이 되고 있는 바다도 붕괴되고 있어 인류와 지구의 미래는 내일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3,000만종 중에 한 종인 인간이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 생태계를 살해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폭스 신부는 오늘날 교회 위기는 예언자적 감각을 상실함으로써 영혼이 움츠러들었고 세상과 자연과의 결속을 상실함으로 데카르트적 사유와 계몽주의가 갖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그리고 어거스틴이 형성한 타락-구속의 영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유는 몸의 영역을 경시하고 살아 있는 우주론을 상실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거만함에 빠져 자연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기계론적 사유는 우주적 기쁨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토양 살해, 생태살해 등 지구적 살해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폭스 신부는 인류가 실패하는 원인을 불신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창조자임을 믿지 않고, 경제적 정치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지구의 좋은 선물들을 분배함으로써 지구촌을 경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기에 실패하였다고 지적했습니다.

폭스 신부의 생태신학적 특성은 전 자연을 거룩성의 표시(sign)로 이해하는 성례전적 전통에 근거하여 우주론적 창조신학을 정립하려는 데서 나타납니다. 폭스 신부는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이란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근원적인 선(Original goodness)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폭스 신부의 책 ‘우주적 그리스도의 도래’(The Coming of Cosmic Christ)는 우주적 기독교 전통을 회복시켜 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역사적 예수에게로 제한되거나 인간 존재와 관계하는 분만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관계적인 삶의 우주적 원리로서 전 피조물 속에 현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내재적 지혜라고 해석합니다.

◾ 창조영성의 길
폭스 신부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기에 앞서 충분히 아름답고 선한 존재로 원복을 주장함으로 창조영성의 길을 제시합니다. 폭스 신부가 주장한 창조영성은 긍정의 길, 부정의 길, 창조의 길, 변혁의 길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긍정의 길은 감사와 황홀의 길입니다. 이는 생명인 우리와 만유인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깊이를 느끼고 맛보는 여행을 의미합니다. 폭스 신부에겐 우주 자체가 거룩한 예배행위이며 우주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모든 사물, 시간, 공간을 통해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력(다비르)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신적 창조력은 말을 넘어 행동을 내포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은 축복을 선포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긍정의 길은 감성, 단순함, 땅스러움의 겸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다함은 욕망, 도덕적 격분, 열정을 긍정하는 것이며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가 보여주는 겸손입니다. 모든 만물은 움직이며 춤추고 노래하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모든 만물 안에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주적인 이유입니다. 삶을 경축하는 일은 하나님 창조의 복입니다. 그러니 만물과 삶을 경축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두 번째 부정의 길은 비움과 어두움의 길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서도 우주적 존재임을 배웁니다. 비워지면 무와 대면하게 되며 어둠과 벗할 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지점에 이르면 통찰의 기회를 얻게 되며, 해방에 투신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비움이 일어나고 고통과 함께 여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자비를 인식하며 강인해져 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됩니다. 죄는 놓아버림을 거부함으로 신비와 어둠과 미지의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구원은 비움으로 시작되며 비워진 인격을 통해 정의와 자비에 민감해집니다. 그 비움으로 신적 은총의 통로가 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는 신적 창조력이 강력하게 솟구쳐 흐르는 예언자가 되셨습니다. 놓아버림이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셋째 창조의 길은 하나님의 모상이자 공동창조자인 우리의 창조성을 신뢰하는 길입니다. 예술의 힘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창조는 우주적 에너지입니다. 우주는 탄생 중이며 창조활동의 장구한 과정을 밝고 있습니다. 모든 유기체들은 지속적으로 출산을 하고 있으며 그 창조력에 의해 모든 존재는 예술가로 살아갑니다. 창조하는 것은 신성과의 닮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술의 힘을 회복시킵니다. 예술의 힘은 사회변혁의 도구가 됩니다.

넷째 변혁의 길은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의 길입니다. 창조영성은 정적인 관상보다 행동하는 자비와 정의를 강조합니다. 아나윔(사회적 약자)을 위한 예언자의 길입니다. 창조영성은 무력한 자의 처지에서 힘과 지혜를 길러내고 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공헌합니다. 창조력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구축하는 살아 있는 예술성입니다. 성령은 생태적 조화와 지구적 문명의 재창출로 공동창조자인 우리를 부르십니다. 창조영성은 지구의 약자들, 아나윔을 위한 영성입니다.

폭스 신부가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구성요소는 종교의 영적 잠재력을 다시 일깨워 삶과 제도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폭스 신부는 창조영성을 기반으로 우주 공동체를 주장함으로 우주가 한 가족임을 가르칩니다. 지구 공동체가 한 몸임을 인식하고 생태적 감수성을 발휘함으로 공동창조자로 사명을 완수합니다.

◾ 초대하기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란 시를 함께 읽음으로 대림절의 자리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이 시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새벽의 사람이듯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절실하게 기다린 사람만이 오시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평화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대림절의 자리는 기다림입니다. 대림절 첫 주에 이와 같은 설레는 마음이 우리 안에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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