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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표지를 식별하라
주현절 설교문(19. 1. 6)
2019년 01월 07일 (월) 15:27:56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현절 설교문(19. 1. 6)
마태 2:1-12 “역사의 표지를 식별하라”

2019년 신년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 날개 아래 품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3.1운동은 기미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일에 맞춰서 일으킨 만세운동으로 한반도 전체로 점화했습니다. 임시정부는 3.1운동 한 달 열흘 뒤인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출범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대한’과 국민이 주인이란 뜻을 합쳐 ‘대한민국’이라고 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신년 1월 1일자 신문을 매우 흥미롭게 기획했습니다. 100년 전 오늘로 돌아가 1919년판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따로 특별판을 만들어서 일제 때 독립운동 소식, 일제의 식민지 수탈, 폭력지배 등 그 때 시점에서 조선 민중의 삶을 기사화했습니다. 제일 가슴 아픈 것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조신민중의 처참한 삶입니다. 이렇게 굶주리는 이유는 일제가 조선에서 나는 쌀을 모조리 일본으로 강출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조선은 만성적으로 기아에 허덕였습니다. 충청 전라 경상 삼남에서는 기근 탓에 살아 있는 아이를 땅에 묻는 극악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성시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어버리는 아이가 많았습니다. 생활난으로 음독하거나 우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기사들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빈번하게 실렸습니다.

민중은 살기 위하여 풀뿌리, 나무껍질 연명은 예삿일이고 찰흙을 끓여서 죽처럼 먹어야 했습니다. 영양불량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식민지 폭력지배는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조선 총독은 왕과 다름없습니다. 일왕에게만 책임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입니다. 총독은 군대와 경찰을 일체화한 헌병경찰제를 도입해서 조선민중을 혹독하게 지배했습니다. 일상적인 고문과 거주제한, 집회결사의 자유 불허, 언론자유 말살, 태형령을 남발했습니다. 태형은 곤장으로 볼기를 때려 불구를 만들거나 망신을 주는 야망적 형벌인데 오직 조선인만 대상입니다. 1918년 태형 처분자는 무려 3만 8683명입니다. 영국의 매켄지 기자는 보도하기를, “일본 순사들에게는 그들이 원한다면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도 한국인을 구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해마다 수만 명에게 태형을 가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남는 것이라고는 줄을 이은 불구자와 시체뿐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또 동양척식회사의 수탈도 악명높았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라는 명목으로 조선 농민의 토지를 몰수했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주인 없는 땅이라고 하여 몰수하고, 신고하려 해도 문서가 없으면 대대로 농사지은 토지 점유권을 인정받을 길이 없습니다. 동양척식회사는 내지인이 조선으로 이민 오면 여비, 주택, 영농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문전옥답만 골라서 챙겨주므로 생활 불안에 쫓기는 일본인들 발길이 쇄도했습니다. 세브란스 의전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말하기를, “동양척식회사는 한국인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돌려주는 거대한 조직체”라며, “동양척식회사의 활동보다 한국인들의 원한을 더 사무치게 한 일도 드물다”고 했습니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어떤 업을 했을까요? 고리대금업을 했습니다. 조선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약조한 날짜를 넘기면 논을 몰수해가는 식입니다. 그런데 상환날짜가 되어 찾아가면 사무실을 잠그고 대응을 안 해 놓고 상환일을 어겼다고 우기는 수법입니다. 사채업하는 조폭이 이런 수법으로 서민 등을 쳐 먹는데, 그 수법이 일제에게 배운 것이라니! 게다가 사채시장에서 제2 금융권이 된 저축은행 전주 60%가 일본 자본이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원이 일제부터라니! 우리가 친일청산하기는커녕 여전히 생활 구석구석은 그들의 영향아래 있다는 게 한숨 나옵니다.

다행인 것은 한겨레신문과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가 의뢰한 <3.1운동에 대한 국민의식>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60%가 친일잔재청산 등 역사바로세우기라고 응답했습니다. 3.1 운동 백년을 기념할 때, 정부행사로 끝나지 말고 대중의 정신뿌리부터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주현절(主顯節)은 "주님이 공식적으로 나타난 날"을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 개신교에서는 주현절(성공회는 공현절)이라고 부르며, 동방 정교회에서는 신현 대축일, 주님 세례 대축일 또는 성삼위일체대축일이라고 부릅니다. '주현' 또는 '공현', '신현'이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神性)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을 뜻합니다. 이를 서방 기독교에서는 동방 박사가 예수를 찾은 때로 보고, 동방 기독교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때로 봅니다.

우리가 교회력을 지키고 매일 성서일과를 묵상하는 이유는 일 년 365일을 습관적으로 살기보다는 주님의 일생을 의식하고 함께 동행하라는 뜻입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일상의 대부분이 습에 기반하지만, 그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수행적 생활을 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비화입니다. 누가복음의 탄생이야기와는 완전 다릅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 아무도 이 문제로 번민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예수탄생 말씀이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가 하고 목사에게 따지러 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심이 워낙 투철해서 어떤 조건에도, 어떤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누가에서는 모친 마리아가 방을 구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 거리다가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을 보니 아기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습니다.(11절) 아기 예수의 방문자도 완전 다릅니다. 누가는 목자들이 예수탄생을 축하하고, 마태는 동방박사가 경배합니다. 서로 만나지 못했나요? 시차를 두고 다녀갔나요? 모순을 없앤다고 억지로 하나로 꿰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셉 가족의 이동 동선을 보자면, 누가는 나사렛에서 살다가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낳고 나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베들레헴에서 시작해서 헤롯왕의 학살을 피해 애굽으로 급히 피난가고 애굽에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갑니다.(2:23) 이동동선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나사렛은 요셉이 원래 살던 곳인데, 마태복음을 보면, 나사렛은 요셉가족이 유대지방을 피해 처음 찾아간 낯선 곳입니다. 하나하나 비교하자면 이렇게 다릅니다. 지금 같으면 청문회를 열어서 두 저자를 소환해서 왜 이야기가 서로 다르냐고 추궁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들은 매우 의아해 할 것입니다. 왜 이게 문제지? 하고. 지금 우리가 왜 복음서가 서로 다르지? 하고 느끼는 의문은 후대 산물입니다. 탄생이야기를 최초로 접한 독자들은 그런 의문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탄생이야기가 사실전달이 아니라, 오직 구세주 예수의 탄생이 전하려는 증언목적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전하려는 탄생증언목적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특이점이 있습니다. 탄생이야기인데 예수탄생 자체언급은 1절이 전부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나머지는 사람들이 예수 탄생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서술입니다. 이런 서술방식은 부활증언도 똑같습니다. 복음서 부활증언에서 예수님의 부활 자체언급은 매우 짧습니다. 그냥 살아나셨다가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접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나타나나요?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헤롯왕과 예루살렘을 차지한 주류유대인들이고, 또 한 부류는 동방박사로 나타나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시냐는 동방박사의 말에 헤롯왕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이 당황의 정도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서 경악했다는 뜻입니다. 개역한글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소식이 누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지만 또 다른 부류에게는 재앙입니다. 누구에게 재앙인가요? 현실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하며 누리는 세력입니다. 그 특권질서가 깨지므로 재앙입니다.

작년에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전범국가 일본은 멀쩡하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범죄의 댓가는 되레 우리 민족이 된통 뒤집어썼습니다, 그 형벌의 대가로 분단된 지 70년 세월이고, 한국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있고, 이산가족은 고령으로 차츰차츰 세상을 떠나고, 분단의 임계점이 정점에 달한 시점이었습니다. 북미 적대관계로 항상 전쟁위협에 긴장해야 하고, 끝없는 전쟁연습과 무기대결로 평화는 멀기만 했습니다. 양 나라 민중의 삶도 고단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보우하사, 적대관계가 끝나고 평화분위기가 한반도를 덮었습니다.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유독 끈질기게 평화정세를 깍아내리고 냉전질서를 고수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누군가요? 냉전질서를 통해 단 맛을 누린 집단입니다. 또 반공이데올로기와 한미동맹에 세뇌된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들을 안보마피아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질서가 깨지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 평화정세를 극도로 부정합니다.

예수 말씀 중,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마 12:32)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냉전세력이 평화흐름에 대해 계속 저주스런 부정을 하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이 말씀이 저런 자들에게 해당하는구나! 계속되는 말씀이 뒷받침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마 12:34-35)

예수가 말씀한 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1세기에는 민중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율법을 독점한 채, 기득권 질서를 고집하는 세력입니다. 21세기에는 분단으로 인해 민중이 겪는 한과 고통을 애통하지 못한 채, 성령이 역사하신 획기적인 평화흐름을 알아보고 동참하지 못하고, 냉전체제와 거기서 나오는 단 맛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력입니다. 사건은 항상 일어납니다. 요는 그 사건을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령이 일으키는 역사의 전환에 동반자가 되십시오.

헤롯왕과 대제사장, 율법교사들은 예루살렘 기득권 질서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지에 대해 헤롯왕이 묻자, 주류유대인은 미가 5:2를 갖다 대며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답합니다.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입니다. 어둠의 이스라엘을 밝게 할 새 통치자가 나왔다는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자기들 입으로 말하면서도 새 통치자를 맞이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냥 예루살렘에 안주하기에만 바쁩니다. 안주하는 삶이 얼마나 구원과 거리가 먼가를 주류유대인이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그 먼 곳에서부터 별을 따라 왔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열망과 그 세상을 이루실 분에 대한 흠모가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별이 우주에 떠 있는 천체이거나, 어떤 천문현상은 아닙니다. 별의 반짝임이 우리 눈에 포착되는 것은 몇 억 광년이 지나서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별은 동방박사들을 거의 네비게이션 수준으로 인도합니다.(9절) 즉 이 별을 우주공간에 있는 별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별은 은유입니다.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요? 역사의 표지입니다. 한겨레 21이나 시사인 잡지의 표지에 어떤 사진을 싣는가가 그 주의 핵심이듯이, 그래서 편집자는 표지사진에 온 정성을 바치듯이, 동방박사는 점성가로서 별의 특이한 움직임을 역사의 표지로 알아보았습니다. 역사를 전환시키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별의 움직임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그리고 별의 움직임에 지극정성으로 반응했습니다. 올 한 해 살면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역사사건에 대해 깨어 관찰하십시오. 하나님이 이 땅을 돌보시는 표지로 고백하십시오. 평화의 구주가 다스리는 동터오는 하나님나라를 기꺼이 맞이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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