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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주일설교문(19. 4. 7)
2019년 04월 08일 (월) 11:17:55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4. 7)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빌 3:4b-14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교회 문제는 무엇인가요? 문제는 한가한 표현이고 위기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입니다. 맘몬을 숭상합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사모합니다. 높은 자리 오르는 권력을 지향합니다. 교회가 종교사업체가 되었습니다. 늘리고 넓히고 높이는 규모를 지향합니다. 교회의 가치를 세속적 욕망과 동일시합니다. 이건 매우 위험한 현상인데, 위험하다는 자각도 못합니다.

   
▲ 백창욱님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진짜 심각한 고질병이 있습니다. 역사의식부재 병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자각이 희미합니다. 그 무의식은 권력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나쁘다 못해 악한 권력자로 판정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에 대해서 놀랄 만치 관대합니다. 우리가 공공의 적으로 여기는 권력자들에 대해 무비판적입니다. 그들이 당대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독재자가 자행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민중들, 그 기구한 역사에 대한 애통이 전혀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팔복말씀이 무심합니다.
역사의식부재는 신앙을 개인의 범주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기독신앙은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정형화했습니다. 개인화된 신앙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요? 영혼구원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구원이 교회의 주요담론이 됐습니다. 이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개인의 범주로 국한시켜 버림으로 역사 무뇌아가 됐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책임해도 되는 면죄부를 얻었습니다. 역사를 알아서 역사정신을 오늘 구현하는 것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됐습니다. 헌법 1조가 민주공화국을 선언한대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잘 실행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며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입니다. 공화주의는 군주 독재에 반하는 인민주권으로, 정치·사회면에서 사적 이익보다 평등을 목표로 한 공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정치형태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를 최대한 반영하는 절차에 대한 정의를 강조하고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의 결과, 즉 무엇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행하는가 하는 목적입니다. 민주주의는 늘 쓰는 말이어서 기초 정서가 있지만 공화주의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무식과 무의식이 신앙에도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내 구원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 교회, 내가 믿는 기독교가 번성하고 세상에서 머리가 돼야 한다는 신조로 흘러왔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의식과 실천이 역사와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식이 갖추어져야만 회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개인화한 신앙도 온전해집니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최근에 소성리에서 원불교 교무님으로부터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익산은 원불교 총본부가 있습니다. 익산에서 오래 터를 닦은 까닭에,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시설, 기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종교 시설에는 가급적 자기 신자를 우선 고용합니다. 그래서 직원을 고용할 때 다니는 교회나 교당의 추천서를 받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원래부터 아는 사람은 바로 추천서를 써 줍니다. 만약 새 교우의 경우라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추천서를 쓸 요건이 됩니다. 원불교는 새 사람이 교당에 들어와서 일 년은 지나야 교도로 인정하고 추천서를 써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새로 교당에 와서 일 년 정도 지났다고 합니다. 병원에 취업을 하는데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해서 기꺼이 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병원에 취직한 후, 자기 종교 신분을 밝혔습니다. 원래 다니던 교회가 있는데 담임목사 허락받고 병원에 취직하기 위해서 원불교에 잠시 머문 것이라고 합니다. 취직이 아무리 중하손치더라도 종교를 숨기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나? 원불교 사람들이 느낀 당혹감이 어떨지... 그 말을 듣는 내가 다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한국사회 경제 환경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구조가 된 까닭에 교회도, 교회 사람도 자기 생존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돼가고 있습니다. 과정은 묻지 않고 결과만 놓고 나팔을 붑니다. 자기중심 사고가 극단화돼서,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선이고 자기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다 악이고 사단입니다. 무엇이 교회 사람의 의식이 이렇게 되는데 기여했을까요? 원인자 중 하나는 목사의 설교입니다. 개인의 욕망이 근원에 있지만, 그 욕망을 부추기고 장려한 것은 교회 담론이고 그 담론은 목사 설교에서 나옵니다. 사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대책이 없습니다. 그냥 복불복입니다. 맨날 권력비판하고 욕망을 제어하고 성공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 교회를 선택한 여러분이 신기하고 귀할 뿐입니다.

오늘 빌립보 말씀의 발단도 유대인 설교자들입니다. 이방인도 구원 받으려면 할례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세 가지로 규탄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2절) 할례를 주장하는 그들은 악한 일꾼이고 개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예외없이 예수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하고 새로운 질서로 사는 게 마땅합니다. 새 질서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운명체로서 함께 살고 함께 교회운동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1세기 로마제국에서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은 도로 율법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율법과 무관하게 의롭다고 선언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할례는 결국 자기 육신을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부득이하게 육신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육신은 무엇인가요?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3:5-6) 바울이 자랑하는 육신은 이스라엘에서는 최고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정통성있는 가문이고 율법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집안이며, 주류 중 주류라는 배경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버린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육신의 조건을 사용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육신의 조건을 버렸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바울의 모든 것을 잃게 한 육신은 무엇인가요?
신약성서에서 육신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집니다. 첫째는 살 또는 몸 전체를 말합니다.(고후 7:5) 둘째는 사람 자체를 말합니다.(벧전 3:18) 세 번째는 연약함을 뜻합니다.(막 14:38) 그러나 육신은 영적인 의미가 더 강합니다. 세속적인 열정과 욕망을 지닌 인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엡 2:3) 또 성령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갈 5:17) 정리하면 육신은 하나님 일보다는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전인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육신이 어디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되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됩니다.(롬 12:1) 바울은 자기 욕망이나 자기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수인 육신의 조건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뛰어난 도공의 특징이 있습니다. 뛰어난 도공은 불가마에서 나온 도기를 가차 없이 버립니다. 최고 도자기를 얻기 위해서.

하지만 바울은 버리기만 한 게 아닙니다. 그 빈자리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채웠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해서 다른 것들은 하찮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체험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다.”(12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무엇에 사로잡혔다는 말인가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10절)
비록 바울은 거짓교사들을 규탄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으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바울의 주관심사는 제국 속에서 그리스도교 생존입니다. 황제만이 유일한 그리스도로 울려 퍼지는 제국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존하나요? 제국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 고난, 죽음, 부활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일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가 겪은 삶의 행보를 온전히 따라갈 때, 고난과 죽음, 부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서명원 신부 인터뷰를 소개했습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한 후, 은퇴하고 경기도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컨테이너 명상센터를 하며 가까운 벗 몇 명과 살고 있습니다. 이분 인터뷰에서 알았습니다. 서양도 스카이 캐슬 욕망이 대단하다는 것을. 자신의 모친은 극성스런 헬리곱터 맘이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요즘은 성인이 된 자녀의 삶을 직접 관리해주는 매니저 역할까지 합니다. 서신부는 의사집안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모친의 극성 때문에 의대에 갔습니다. 5년째 공부하다가 한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서 명상하다가 “독신생활, 수도생활을 해야 겠다. 지금 당장”라는 마음의 소리를 뚜렷하게 느끼고, 결단했습니다. 어머니께 말했더니, ‘거짓말쟁이’ ‘위선자’ ‘배신자’ ‘인생의 낙오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동안 투자한 돈을 다 날려버렸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이 분 고백에서 깨달았다. “아,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는 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옛날의 조건(그 조건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하게 보인다 할지라도)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이 열어주는 미지의 내일을 가는 것이구나.” 남동생의 사례는 충격입니다. “제 남동생은 공부를 아주 잘했어요. 모든 과목에서 1등이었죠. 캐나다의 명문 의대에 합격했어요. 어머니가 바라던 바죠. 그러나 동생은 합격 점수를 확인한 날 저녁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어요. 메시지는 분명했죠. ‘엄마,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의과대학에 합격해 드렸어요. 이제 됐죠?’ 이거였다.” 서신부 남동생의 비극은 육신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웅변합니다. 그 욕망이 아무리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끊을 수 없는 혈육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부름과 합하지 않는 한, 그리고 본인의 영이 동의하지 않는 한, 끝없는 부대낌과 갈등과 인생허무를 불러옵니다. 서신부는 자신과 가족의 삶의 부침을 통해 삶과 고난, 죽음과 부활을 고스란히 겪었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도 이와 같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는 말씀은 기독교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계속 유지, 확장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으로 인식합니다. 이웃 종교인은 다 지옥으로 떨어졌고, 오직 기독교담론이 세상을 좌우해야 한다는 굳은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담론이 오늘날 기독교 배타성을 허용하는 근거인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본질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1세기 제국 환경에서 소수자가 생존하는 본질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애통입니다. 특히 고난당하는 사람과의 정서 공감입니다. 한국 현대사 못지않게 그 시절도 제국의 희생자가 허다했습니다. 전쟁포로로 끌려와서 노예가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섬기고 한 편이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았고, 바울도 그리스도의 삶 그대로 따라 살고 싶다고 절절히 말합니다. 우리 역시 바울이 사로잡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담가야 합니다. 그것은 배타적 기독교 세계 건설이 아니라, 악에 저항하며 신음하는 자와 평화를 세우고 형제애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미지의 내일에 발을 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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