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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지켜보았다
수난주일 주일설교문(19. 4. 14)
2019년 04월 15일 (월) 11:12:40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4. 14) 수난주일
누가 23:1-49 “이 일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수난주일입니다. 방금 함께 읽었듯이 본문이 매우 깁니다. 한 장 전체가 본문입니다. 시간상 23장을 읽었는데, 관련본문은 22:14부터입니다. 평소 다른 주일 복음서 본문은 한 사건 중심으로 본문을 정하는데 오늘 수난주일은 예수가 수난 당하시는 전 과정을 본문으로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어느 한 사건에 머무르지 말고 전체 과정을 통해 예수 수난을 되새기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의 수난과정을 장면마다 살펴보면서 각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쳐보겠습니다.

   
▲ 백창욱님(사진제공: 강형구님)

오늘 복음말씀인 수난이야기의 서술목적과 관련해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오늘 수난이야기 역시 예수 사후 훨씬 후대작품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단서는 14절에 나오는 ‘사도들’입니다. 예수의 직접 제자를 일컫는 말은 ‘열둘’입니다. 사도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나중에 교회가 제도로 자리 잡은 이후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예수님과 동거동락한 사람들의 증언이 꼭 필요했던 바, 예수의 직계 제자들을 교회의 공식 직함으로 높여 부르는 게 사도입니다. 즉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난이야기는 그 때 사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 한참 후에 교회가 예수의 수난사건을 정리, 반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난이야기 안에는 당연히 교회 입장을 반영하는 시각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기도장소입니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유명합니다. 겟세마네는 마태, 마가의 증언입니다. 오늘 누가 본문의 기도장소는 올리브 산입니다.(22:39) 가장 기초적 사실부터 다른 이유는 복음 저자 목적이 사실증언이 아니라 자기 의도대로 서술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22:45을 보면,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이유가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라고 합니다. 마가나 마태와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서술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겟네마네 동산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괴로운 심정을 전혀 모르고 잠만 퍼 잡니다. 아마 누가 저자는 예수와 동감하지 못하는 제자들 허물을 가려 주고 싶어서 장소도 겟세마네 대신에 올리브산이라고 표시한 것 같습니다. 만약 사도들이 원래 했던 행동 그래도 증언하면, 체면이 깍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도들의 권위를 변호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과정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보겠습니다. 22:14 첫 말씀 “시간이 되어서”는 해가 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하는 시간임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해가 질 무렵,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합니다. 예수의 수난이야기는 목요일 저녁, 유월절 양을 잡아먹는 무교절 만찬에서 시작합니다. 시간을 밝히는 이유는 목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오후 세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만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주목하자는 뜻입니다.

제일 첫 장면은 마지막 만찬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습니다. 예수는 이 자리에서, 포도주와 빵으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그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요? 우리가 고난주간 때 꼭 묵상해야 할 주제입니다.
슬프게도 예수는 이 마지막 만찬 자리에 자신을 팔아먹을 제자가 있는 것 까지 압니다. 이처럼 예수의 수난에는 인간적으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애가 담겨 있습니다. 3년 동안 동행한 제자가 자신을 팔아먹을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요? 이것 역시 묵상 주제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사람을 어디까지 견디고 용납해야 하는지에 대해 도전합니다.

다음 장면은 제자들의 말다툼입니다. 말다툼 주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입니다. 방금 전 스승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들의 당면과제에 빠져 있습니다. 스승이 마음이 어떠한지, 심난한지, 무탈한지 돌아볼 기색은 없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지향하는 바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말다툼 장면이 암시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황교안 나경원 자한당 세력이 믿는 하나님과 양심민주시민이 믿는 하나님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이 제 책 출간기념회 사진을 공유하면서, “나는 백 목사님과 같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제 심정도 대구의 수구반공친미 목사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다음 장면은 예수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합니다. 베드로가 호언장담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22:33)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22:3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호언장담을 조심해야 합니다. 좀 재미없기는 하지만, ‘예’ 할 때는 ‘예’ 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 하는 게 허물을 줄이는 지혜입니다.

다음 장면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칼을 사라는 말씀입니다.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이건 무슨 뜻인가요? 무장투쟁을 준비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런데 그 다음 말씀에서 제자들이 칼 두 자루가 있다고 하니까 넉넉하다고 합니다. 칼 두 자루로 무장투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승의 유고라는 비상한 시기가 다가오니 최소한의 방어를 준비하라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다음 장면은 올리브산 기도장면입니다. 서두에 말씀한 것처럼, 제자들의 약한 모습은 다 블라인드 처리하고,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든 것’으로 가공했습니다. 또 십자가형을 앞에 둔 예수의 처절한 심정도 다 삭제했습니다. 그 대신,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일반적인 기도교훈이 나옵니다. 이것만 봐도 수난이야기가 예수의 수난 그 자체를 보도하기보다는 지금 교회의 영적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장면은 예수께서 체포당하는 사건입니다. 유다가 스승을 넘겨주는 일에 앞장섭니다. 체포당함으로 예수는 본격적으로 수난 상황에 들어갑니다. 예수는 대제사장 집으로 연행됩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신상이 궁금해서 몰래 뒤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집에서 사람들이 베드로더러 예수와 한패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 칠 때와 다르게 너무도 나약하게 세 번 연속해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할 때, 예수께서 뒤돌아서서 베드로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어떤 시선을 보냈을까요? 배신에 대한 책망, 한심해 하는 시선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한 연민의 감정을 보냈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사람심리가 그렇습니다. 잘못했어도 그것을 공격하면 반발심을 갖고 자기 정당화를 합니다. 예수의 시선이 따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고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바깥에 나가서 비통하게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베드로도 유다 못지않게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나은 점은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악인은 자신의 잘못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다음 장면은 대제사장 식솔들이 예수를 때리고 온갖 말로 모욕하고 욕을 합니다. 눈을 가리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알아맞히라고 희롱합니다. 예수는 우리에 갇힌 동물이 됐습니다.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의 예언이 떠오릅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53:7)
예수는 이렇게 지배자 무뢰한들에게 밤새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무뢰한들은 예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산헤드린으로 그 다음에는 빌라도에게 또 그 다음에는 헤롯에게 그리도 다시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 예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모습이 꼭 돌림빵 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가요? 어차피 사형결정과 집행권은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다른 지배자들은 헛빵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예수를 죽이는 공범자들이 누구인가를 부인할 수 없도록 빠짐없이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로마 못지않게 이스라엘의 지배세력들, 대제사장, 산헤드린, 헤롯 모두 이스라엘 민중 등에 빨대를 꽂아서 빨아먹은 악인들입니다. 그러니 민중 편을 드는 예수를 가만 둘 수 없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자기의 정치적 이익에 민감한가는 23:12이 증명합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였으나, 바로 그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빌라도와 헤롯은 이스라엘 주도권 다툼 때문에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먹이를 놓고는 친구가 됐습니다. 이들이 지향하는 바가 오직 자신의 욕망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사형시킬 혐의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명절 전통에 따라 예수를 방면하려고 합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에게 맞서서 예수를 변호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항상 이 대목이 의아했습니다. 예수를 변호하고 살려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빌라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점입니다. 성전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눅 13:1) 빌라도의 잔인함을 볼 때, 빌라도가 의로운 인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이 장면 역시 예수 당시의 상황이라기보다는 후기 교회 사정을 반영합니다. 기독공동체가 로마제국과 척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교회 상황이 빌라도를 좋게 서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인 최종 결정은 빌라도가 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의 뜻대로 하게 넘겨주었다.”(23:24,25) 그래서 빌라도의 행위는 교회기록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빌라도의 권력행사는 땅위의 권세잡은 자들이 그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면교사입니다. 불의한 세력에 굴복해서 죄 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영원히 남았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권력의 도리를 지키는 권세자는 매우 드뭅니다. 악한 권력자는 권력유지를 위해 민중을 떼죽음시키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다음 장면은 예수와 여자들과의 대화입니다.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모습에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여자들을 돌아보며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23:28) 내내 침묵하시던 예수가 여자들에게는 길게 말씀합니다. 무려 네 절에 걸쳐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말씀 내용을 볼 때, 예수 시대 상황이 아니고 예루살렘 항쟁 때 로마에 진멸당하는 상황에 대한 애통입니다. 어째서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고 하나요? 로마가 예루살렘을 진멸할 때, 아이까지 남김없이 도륙하는 재앙 때문에 그전에는 아이가 없어서 소외, 멸시받았던 여자가 차라리 낫다는 애가입니다. 즉 예수의 입을 빌려서 예수의 고난에 자신들이 겪은 비극을 대입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의 수난이야기 보도 속에 자기들 형편을 서술하며 교훈을 되새깁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 수난사의 백미는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이야기입니다. 죄수 가운데 하나는 예수를 모독합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예수께 청원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그러자 예수는 곧바로 화답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이 말씀 뜻은 무엇인가요? 정말 십자가상에서 예수와 죄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나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어째서 이 중요한 사건을 마가와 마태는 생락했나요? 누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우리 주 예수는 구세주이시므로 죽음이 경각에 달린 죄수조차도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께 청원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세주 되심은 백부장의 고백에서도 나옵니다.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백부장이 본 것은 무엇인가요? 앞에 일어난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일, 그리고 예수가 큰 소리로 부르짖고 숨을 거두신 일입니다.
골고다 언덕과 성전은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실내에 있는 휘장이 찢어진 게 골고다에서 보일 리가 없습니다. 또 예수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고 아람어로 부르짖었습니다. 백부장이 아람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실여부를 증언하는 게 아니라, 예수의 그리스도 되시는 위엄이 백부장을 덮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들이 거짓과 억지, 폭력의 현장을 괴롭다고 무섭다고 피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두려운 일을 끝까지 견뎠습니다. 역사의 증인이 됐습니다. 그 증인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교회에 남겼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도 예수의 수난을 알게 됐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따릅니다. 예수의 수난이 예수 개인에게로 끝나지 않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 수난 현장을 지켜보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진실과 생명이 되살아나는 역사의 불씨가 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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