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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팔아 칼을 사라
구속사적 이해와 역사적 이해
2019년 04월 15일 (월) 14:53:17 조헌정 choshalom@gmail.com

[옷을 팔아 칼을 사라]
막 11:1-11; 눅 22:31-38

오늘은 사순절 여섯번째 주일로 흔히 종려주일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 주간을 앞두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시는데, 그때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향해 연도에 서 있던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환호를 하였는데, 이를 두고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계교회 성서읽기는 종려주일에는 입성과 수난 중 하나의 본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저는 향린교회를 목회하는 기간 중에는 입성 장면의 성서 본문을 선택하고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장면을 재현하여 광대 복장을 입거나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들어왔고 ‘바보 예수’라는 하늘뜻펴기 제목을 진행하여 왔다. 오늘은 두 말씀을 다 본문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 중 가장 논란이 큰 오늘의 하늘뜻펴기 제목과 관련하여 두 본문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글쓴이 조헌정님은 전쟁반대 평화행동 상임공동대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서울본부 상임대표, 민플러스 대표(이사장)이며, 이전에는 평화통일연구소 및 향린교회를 섬겼다.

[구속사적 이해의 맹점]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일에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목사들이 가장 많이 설교하는 방식은 죄가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다고 하는 것이고 이를 믿고 고백하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를 구속사적 이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이해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신학적 물음과 성서 구절들이 있다. 첫째, 고대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동물의 피를 대신 바치든가 때로는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제1성서가 말하는 율법시대의 제사 방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 한 번에 이런 피 흘림 제사 방식은 완결되었으며 누구든지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 구원이 임하는데 이를 복음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우리는 자신의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고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뭔가를 신에게 바쳐서 노여움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하는 예전의 제사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그렇게 구속사적으로 이해해 버리면, 십자가 죽음 이전에 사셨던 지상에서의 예수의 삶은 별로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정치 종교 지도자와의 갈등이나 권력 비판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게 된다.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목적이 되기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지고 예수가 하신 말씀에 대한 구속사적인 해석만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바울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보게 되면 이는 자발적인 희생이 전제되기에 재판의 과정과 로마가 정치 반역자들에게만 행했던 십자가 처형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베드로의 부인도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예수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가롯 유다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던 것 또한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 십자가 죽음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가롯 유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신이 없었더라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없었을 것이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인류 구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롯 유다를 꼬드긴 사람은 악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라는 주장이 타당성을 얻게 되고 유다는 배반자가 아니라 스승 예수의 계획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가장 위대한 제자가 된다. 신앙의 모순이 생겨난다.

마지막 네 번째 생기는 문제는 이와 관련한 인간 고통의 문제이다. 인간 고통에 대해 십자가가 어떤 답을 주어야 하는데, 십자가 죽음을 죄의 용서와 인류 구원의 초점을 맞추어 구속사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고통은 하나의 통과의례로 이해되고 바로 부활의 승리로 건너가고 만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삶과 현실의 종교가 아닌 죽음과 영생의 종교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라고 하는 니체의 비판이나 민중의 아편이라는 맑시스트들의 비난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갈릴리 공생애의 삶은 당시 민중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 저들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구원사적 교리로만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새끼 나귀를 타신 일은 그냥 낮아지시기 위한 겸손의 행위로만 해석되고 만다. 만약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꼭 나귀를 타고 가야 낮아지시는 것인가? 그냥 걸어가시면 낮아지시기 위한 길은 아닌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사적인 접근이 아닌 역사적 접근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신 일은 단순히 겸비함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로마의 기병대를 비웃는 정치 풍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일행이 입성하던 시기는 바로 로마군이 서문을 통해 들어오는 같은 때였다. 서편 길가에는 총독과 헤롯왕, 대사제는 물론 내노라 하는 사회의 지도자들과 부자들이 길에 나와 겉옷을 벗어 레드카펫을 만들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Pax Romana! Pax Romana!’ ‘로마의 평화는 영원하리라. 가이사 황제 만세 황제 만세!’를 외쳤던 것이고, 그 반대편 동쪽에서는 가난한 민중들이 예수 일행을 환영했던 것이다. 그들 또한 변변치 못한 옷이었지만, 겉옷을 벗어 레드카펫을 대신했으며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하며 이전 다윗 왕이 이룩했던 정치적 영광을 들먹이며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한을 달랬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에는 왜 이런 얘기가 빠져 있는가? 그건 당시로서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었기에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잘못하면 이런 기록은 로마정부로 하여금 복음서를 불온문서로 낙인찍힐게 만들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제 1장 종려주일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마르쿠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오희천 옮김. 중심 2007)

[피하고 싶은 ‘잔’의 정체?]

이 관점에서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 몇 개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익히 아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하느님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체포 직전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드렸던 기도이다. 여기서 피하게 해달라는 잔은 무엇이었을까? 십자가 처형이었는가? 그렇다면 예수가 원했던 ‘나의 뜻’은 지금의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10년 20년 더 사는 것이었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엄청난 실망을 금할 길이 없어진다. 이렇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임을 당할 것을 여러 차례 예고했다. 심지어는 헤롯이 당신을 죽이기로 작정했으니 피하라고 하는 권고를 받았을 때에도 예수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헤롯을 음흉한 여우로 조롱하고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가 있겠느냐며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권력의 비호를 받는 희생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황제 얼굴이 들어가지 않는 성전용 화폐로 바꾸어주던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고 채찍을 들어 저들을 내어 쫓으셨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하실 수 없는 일종의 민중 폭동이었다. 마가복음은 성전 뜨락을 기구를 들고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왜냐하면 당시 성전 뜰의 크기는 오늘날 축구장 세 개 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을 치루고 나서 채 5일이 지나지 않아 이를 후회하면서 ‘이 (죽음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해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가 후회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의인들이나 의사들이 자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조폭들도 이런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음이 임박하니까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명예훼손죄로 고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도 교인들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아멘! 하고 만다. 왜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이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는가? 그건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모순은 이 말씀뿐만이 아니다. 누가복음 본문 22장 15절의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유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이미 죽음에 대한 완전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22절에서는 가롯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시며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대로 가지만 사람의 아들을 잡아 넘기는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뜻을 아시고 죽음의 길을 작정하셨다. 30절에서는 이미 죽음 이후 하느님의 나라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37절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성서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피하고 싶은 ‘잔’을 ‘십자가 죽음’으로 해석하고 ‘나의 뜻’을 ‘체포 회피’로 이해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저자 누가의 숨은 의도]

그런데 마가가 이 기도에 앞서 예수께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있었다”고 언급함으로 피하고자 했던 ‘잔’이 십자가 죽음이었다는 착각에 확신을 주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누가는 이런 마가의 표현 방식이 예수의 고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 이 “공포와 번민”이라는 단어를 빼고 보다 구체적으로 암시하는 몇 구절을 적어 놓았다.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 웬 칼 얘기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 이어지는 얘기에는 예수를 잡으러 오는 무리들이 다가오고 가롯 유다가 입을 맞추어 예수를 잡아 넘기려고 할 때에 제자 중 한 사람이 칼로 대사제의 종의 오른쪽 귀를 내려쳐 떨어뜨린다. 그러자 예수는 이를 주어서 다시 붙어준다. 종의 귀를 내리치기 위한 목적이었나? 논리적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오는 로마 군인들과 대항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 시각에 칼을 사야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옷을 팔아서라도 사라니, 그 반대로 칼을 팔아 옷을 사야 할 때라면 말이 되겠다. 일의 진행상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일종의 암시로 이해한다. 이것이 진정 예수의 말이었는지 혹은 누가가 예수의 입에 옮긴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에 이 말이 쓰여 있다는 말이고, 누가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말이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1장 1-4절)

생애 마지막 주.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께서 받으신 가장 큰 유혹은 무엇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올라가셨을까? 이미 갈릴리 세포리아 지역에서는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2천여 개의 십자가가 발굴되기도 했다. 굳이 예루살렘까지 가야 십자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갈릴리에서도 죽임을 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굳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예루살렘이야 말로 당시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로마의 빌라도총독과 헤롯왕이 거하는 장소이며 성전 율법체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 거대한 악에 대해 채찍을 들었다. 이런 행동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건 민중 폭동이었다. 폭동은 여러 차례 일어났었고, 그리고 지금은 바로 민중 폭동이 가장 일어나기 쉬운 해방절 유월절기였다.

문제는 폭동을 일으키기는 쉬웠지만, 그러나 그 희생물은 결국 민중들이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것은 역사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폭력을 그냥 사랑이라는 단어로 덮는 행위는 폭력을 용인하는 또 다른 악이었다. 여기에 예수의 고민이 있었다. 곧 예수께서 피하시게 해 달라는 ‘잔’은 자신의 죽음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민중 폭동이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그 유혹 또한 민중 폭동을 통한 새로운 나라, 곧 예수를 유대의 왕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였다. 제자들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누가 우의정과 좌의정에 앉을 것인지를 놓고 다투기까지 했다. 그리고 칼도 준비가 되었다. 저들은 3년동안 이 때를 기다려 왔다. 그런데 예수는 마지막 순간 이를 포기하신 것이다. 폭력적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물론 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성공의 유혹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가롯 유다의 배반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룟’은 헬라어 성서나 영어성경에는 모두 ‘이스카리옷’(Iscariot)으로 되어 있다. 왜 우리말로 가롯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스카리옷은 지방 이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출신 성분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유대독립운동을 하는 젤롯당 중에 가장 폭력적인 방식을 취한 그룹이 시카리파(Sicari)이다. 시카리는 단검을 뜻한다. 우리말로 하면 자객단이다. 가룟유다는 바로 그 출신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민중폭동을 통한 유대의 독립을 포기하자 배반감에 불타 스승을 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일행의 재정을 책임지던 유다가 돈에 눈이 어두워져 스승을 팔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왜 저자 누가는 맥락에 맞지 않는 ‘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도달하기까지의 예수가 가졌던 고민을 우리 모두가 알아채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하나 누가는 역사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유월절에는 죄수 한명을 사면하기로 되어있었다는 풍속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바라바가 예수 대신 풀려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예루살렘 유대 지배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는 이 바라바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예수를 왜 이토록 두려워했던 것일까?

14년 전 이명박정권 초기 시절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여 소녀들이 촛불을 들었고 이어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수십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군중집회로 변했다. 그러자 명박산성이 서고 이어 경찰의 폭력으로 인해 시위는 중단이 되었다. 매일 광화문 일대에는 수천 명의 경찰들이 곳곳에 서서 사람들을 감시했다. 그때 향린교회 수십 명은 매주 목요일 밤 일렬로 서서 촛불을 들고 교회에서 출발하여 종로2가와 광화문 시청을 돌아오는 일인 걷기 시위를 진행했다. 그때마다 경찰들이 막아서서 촛불을 끄고 가라고 요구했고, 끄지 않으면 강제로 저들이 촛불을 껐다. 권력은 왜 촛불을 두려워할까? 저는 촛불을 바라보면 세상이 좀 더 밝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평안해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촛불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몽둥이를 들었다면 저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꽃을 들고 촛불을 들었기에 저들은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힘이다. 하느님은 예수에게 바로 이러한 민중의 힘을 믿도록 하였던 것이다.

[십자가와 역사 변혁]

옷을 팔아 칼을 사라는 말씀은 포악한 시대를 이겨나기 위한 저항의 표시였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 또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는 말씀은 폭동을 일으키라는 극단의 말씀이 아닌, 역사 변혁에 구경꾼이 되지 말고 직접 참여자가 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훼퍼목사는 이 문제를 갖고 엄청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지었다. 미친 운전수가 버스를 몰고 인도로 뛰어들 때에 목사는 죽은 행인들을 장례나 치루는 일이 아니라 이 미친 운전수를 끌어내리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이것이 곧 평화를 이룩하는 일이라고. 그래서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를 하였던 것이다.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가는 히틀러의 독재정권 하에서 침묵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이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얻어진 값비싼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일종의 배교행위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39세의 젊은 나이에 수용소 형장에서 사라짐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지난주 4월 9일이 본훼퍼목사께서 처형당하신지 64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또한 16일에는 세월호 참사 곧 국가폭력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날을 맞는다. 19일에는 꽃다운 대학생들이 희생당한 419민주항쟁 59주년을 맞이한다. 역사적 예수 신학자 크로산은 말합니다. “지난날에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역사 개입을 기도하며 기다렸지만, 지금은 하느님이 신자들의 적극적인 역사 개입을 기다리신다.”고.

평화란 기도한다고 해서 저절로 굴러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 이를 이루기 위한 분명한 의지를 갖고 투쟁의 현장에 참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의 상징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는다고 해서 절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투쟁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평화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자는 것 그것이 십자가가 말하는 바이며 부활이란 우리가 싸우다 죽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닌 그 희생은 하느님의 선한 역사를 믿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일어서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어 끝내 승리의 역사가 오고야 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부활의 아침은 교회의 절기로서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구체적인 삶에서 역사 변혁의 주역으로 나서는 카이로스의 첫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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