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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다여, 일어나시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설교문(19. 5. 12)
2019년 05월 13일 (월) 11:22:17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5. 12) 부활절 네 번째 주일
행전 9:36-43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장강일기』를 읽은 여운이 묵직했습니다. 임시정부 안살림을 책임진 정정화의 회고록입니다. ‘양자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한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장강은 임정이 상해에서부터 중경까지 양자강을 따라 오간 여정을 상징합니다. 6,300키로에 달하는 양자강의 위엄을 뭐라 말할 수 없어 그냥 장강으로 칭했습니다. 정정화를 알기 전에는 임정도 그냥 대충 돌아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 어디 그런가요.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정정화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상해로 망명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만나러 다음해인 1920년 상해로 갔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귀국할 때까지 26년을 임시정부와 동거동락했습니다. 임시정부가 대외적으로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신규식, 조소앙 등 기라성같은 독립투사들이 있지만, 실제 안에서 뒷받침이 안 되면 헛일입니다. 이번에 장강일기를 읽고 느낀 점은 뒤에서 조용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 역사의 숨은 주역이라는 것입니다.

정정화의 인생에서 인상 깊은 점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혁혁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귀국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활동을 전혀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에 비행기까지 헌납한 악질부역자가 초기 임정에 간부로 이름 올린 것을 근거로 해방 후 자기 동상을 세우려 한 것을 보면, 독립투쟁의 산 증인인 정정화의 은거가 놀랍습니다. 서문을 보면, 이 책을 남기는 부득이한 심정이 절절합니다.
“워낙 사람이 졸해서 어디고 나서기를 극구 꺼리는 이가 다름 아닌 바로 나요, 그래 구십이 가까운 이 나이가 되도록 이러니저러니 입 뻥긋하기를 마다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만 과거사를 만인 앞에 몽땅 털어놓고 말았다.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흉허물가릴 엄두도 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가당치 않은 얘기조차도 모두 내 붓 끝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도대체 내가 이름 석 자를 내걸고 항일독립운동 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여든 여덟의 나이되도록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장강일기는 주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임정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독촉하는 까닭에 88세에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리고 91세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들 김자동(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어머니에 대한 평입니다. "변절, 매국, 부일에서부터 방관, 냉소, 무관심, 안일무사, 이기주의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몹쓸 것들이 종횡무진으로 활개치던 그토록 어려웠던 시기에 어머니는 흔들림 하나 없이 항상 꼿꼿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묵직했는데 그게 무엇일까, 오랜만에 절개가 굳은 사람을 본 여운입니다. 이런 분이 계셔서 후세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이 못다 이룬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꼭 이뤄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 내용은 대단합니다.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요 14:12)이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과 버금가는 이적을 행사했는데 어째서 베드로는 이 사건에 대해 잠잠하지? 하는 생각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베드로가 등장하는 성서 여러 대목에서 베드로는 다비다를 살린 이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죽은 사람을 살린 이적은 복음전도에 혁혁한 증거인데, 왜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비다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서 적극 대외활동을 하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텐데 의아하게도 다비다는 그 뒤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도를 거역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다비다의 사례를 제시하면, 사람들을 평정할 수 있을 텐데, 이 이적사건을 선전하지 않습니다. 다비다 이적은 그냥 일회성 사건으로 지나갑니다. 왜 그런가요? 한편 이런 의문도 유효합니다. 다비다는 죽었다가 살아난 게 맞나?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났나?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성서학당 시간에 성서비평방법에 대해 설명할텐데, 성서에서 이적사건은 오랜 세월, 많은 편집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본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처음에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접한 당사자나 목격자가 있고, 그들의 말이 전승이 됩니다. 그런데 사건을 전할 때 전하는 사람들의 해석이 덧붙습니다. 자연적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전승이 생깁니다. 전승 내용이 한 가지로 통일되면 좋겠는데, 전승을 전하고, 접하는 사람마다 해석이 붙으면서 전승도 다양해집니다. 편집자는 다양한 전승들을 편집해서 하나의 본문으로 정합니다. 이 때의 기준은 편집자의 목적에 합당하고 교회에 덕이 될 만한 전승입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사건이 성서본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이 될 때에는 최초의 사건이 상당히 많이 변화된 후입니다. 편집된 성서본문은 사건 자체의 사실여부보다 그 사건이 주는 의미에 더 주목합니다. 이적사건 역시 사건의 사실성 여부보다는 이적사건의 의미전달이 목적입니다.

행전에서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저자의 최고 관심은 ‘예수도의 핵심인 부활을 어떻게 증거하는냐’ 입니다. 그리하여 두 가지 메시지를 증언합니다.
첫째는 베드로는 두 전설적인 예언자를 능가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사건은 구약에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가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전설적인 이적이 오늘 다시 재현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두 예언자의 이적을 계승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더 우월합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릴 때를 보면, 아이 위에 세 번이나 엎드려서 몸과 몸을 맞추고 야웨께 부르짖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와 똑같은 동작으로 죽은 아이를 살립니다. 아마도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전수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훨씬 간단합니다. 아이 위에 몸을 포개는 동작은 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오직 말로 죽은 다비다를 살립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일으키는 모습은 예수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일으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자 소녀가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막 5:41) 베드로도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나서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행 9:40,41)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이적이 예수 부활의 생생한 실례가 되었습니다.

부활이 다비다에게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비다를 소개할 때 ‘여제자’라고 합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제자’라는 단어는 오직 이곳에만 나옵니다. 다비다는 홀로 여제자라고 불릴 만큼 과부들에게 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가 죽자 과부들이 몹시 슬퍼합니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9:39) 다비다가 평생 누구를 위해 자신을 바쳤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서 민중을 섬기신 예수를 따라 다비다도 온전히 약자 중 약자인 과부들을 섬기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예수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나타난 것처럼, 다비다 역시 자기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다비다에게도 실현되었습니다.

다비다의 부활이 뜻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베드로가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 집에 묵었다(43절)는 서술은 앞의 이적사건과 무관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을 만지는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갖바치와 비슷합니다. 갖바치는 천민입니다. 무두장이 직업도 부정해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유대교의 정결례에 비추어 부정한 사람 집에 머무는 것은 여전히 스캔들입니다. 그런 정결례 스캔들을 감수하면서 무두장이 집에 머무는 베드로는 얼마나 뜻밖인가요? 큰 능력을 행사한 후의 처세가 매우 소박하고 요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한 이적으로 얼마든지 유명세를 누리며 대접받을 수 있지만 다 마다하고 무두장이 집에 묵는 것은 주님이름으로 일신영달을 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또 정결례에 구애받지 않고, 과거 세상과 절연하겠다는 기개가 돋보입니다. 부활을 일으키므로 새 세상을 열어가는 지도자답습니다. 부활기독교는 이제 과거 유습에 매이지 않습니다. 다비다를 다시 살림은 부활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를 상징한다면, 무두장이 집에 머무는 것은 세상 변두리 민중과 함께 새 세상을 살겠다는 실천의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이적을 행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고사하고 병든 자도 단숨에 고치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의 역할은 다한 것인가요? 사실 일세기 성서에 나오는 이적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기댈 데 없는 민중들에게 유일한 구원처였고, 예수가 그 구원처 임을 증거 합니다. 복지, 의료가 일세기보다 훨씬 좋은 오늘날과는 조건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민중에게 구원처가 돼야 하는 사명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하지만 얼마든지 과부들과 한편이 될 수 있습니다. 과부들도 자기들이 죽었을 때 다시 살려주는 능력을 행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곁에 있기를 더 원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가 예수가 민중을 사랑한 것처럼, 민중과 한편이 돼서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워주기를 원합니다. 자본주의 나팔수가 되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돼주기를 열망합니다. 그런 소임을 감당할 때 교회는 민중의 구원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예수도를 이어받아서 예수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가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 계속 살아계시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교회를 보면 심히 회의적입니다. 교회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보면,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대신에 교회세력을 믿습니다. 교회 대신에 다른 존재를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가 정화하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어제 KBS '거리의 만찬'을 소개한 이유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매우 공감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소수자 자녀들과 그 부모들이 처음 겪은 혼돈을 극복하고 성소수자 자녀를 통해 ‘부모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깨닫고, 세상에 대해서도 더욱 통찰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고스란히 이입됐다.
한편 그러면서도 과연 교회도 같은 정서를 공유할까, 생각하니 참, 교회가 문제라는 생각과 교회 자체가 진짜 구원의 대상이 됐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가장 거룩한 것은 가장 휴머니즘적이다.’(사람을 존중하는 인도주의)는 격언에 비추자면, 교회는 전혀 휴머니즘적이지 않습니다. 혐오하고 배제하고 정죄하기만 바쁩니다. 그런 일을 통해 자신을 의의 반열에 세웁니다. 현대판 바리새입니다. 근거랍시고 갖다 대는 성서도 돌팔이입니다. 비단 성소수자 문제만이 아닙니다. 독재자를 비호하고 역사적 비극사건에서 학살당하고, 참사당한 피해자들에 대해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면, 그들이 믿는 예수는 팔레스타인 예수가 아닙니다. 로마제국에서 온 정복자 예수입니다. 예수를 좁디좁은 눈으로 교리적 예수로만 국한해서 믿으니, 스스로 자폐아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모습을 전혀 모릅니다. 그런 모습들이 교회 자체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역력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교회의 위치를 잘 보고 내 신앙을 가늠해야 합니다. 진짜 예수를 믿을 것인지, 아니면 교회세력을 믿을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세력은 신앙과 멉니다. 또 속이기도 좋습니다. 과부의 벗,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가 무두장이 집에 머무는 행적에서 보듯이, 다비다의 부활이 향하는 지점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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