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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온 몸으로 산 세 여자 이야기
책, '세 여자'를 읽고
2019년 06월 05일 (수) 10:44:07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조선희의 『세여자』.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청계천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20세 초반의 단발랑 세 여인을 찍은 사진 한 장. 이 사진을 발판삼아 세 여성의 인생과 역사를 풀어가는 작가의 글 실력이 놀랍기만 하다. 1925년에는 여성의 단발도 사건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래도 임시정부 백주년을 계기로, 그 시절 인물과 역사에 대한 무식을 하나하나 깨치는 중이다.
세 여성의 남자는 박헌영, 김단야, 송봉우, 최창익 등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공산주의자들이다. 하수상한 시절인지라, 삶도 죽음도 평탄치 않았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식민지고 좌우가 사생결단으로 대결하던 이념의 시대고, 또 남북정권이 미국과 소련에 기대어 저마다의 정통성에 광분한 분단의 시절인 까닭이다. 고명자는 일제 때 투옥경력도 보람없이 한국전쟁 와중에 쓸쓸히 굶어죽고,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쓸쓸히 죽고, 허정숙은 북한에서 고위직까지 하고 아흔까지 천수를 누리지만 그만큼 볼 꼴 못 볼꼴 다 겪고 살았다. 마지막 고비에서는 전 남편 최창익을 포함하여 연안파 동지들을 공개 비판하므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덕분에 우리가 이 간단하지 않은 역사를 알게 됐다.
그들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권력투쟁에서 패배, 반당 종파분자의 두목이자 특급 미제간첩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쳐야 했고, 일제가 그토록 잡으려고 했지만 신출귀몰한, 완벽한 공산주의자 김단야는 소련으로부터 일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하고, 최창익 역시 연안파의 거두로 김일성에게 제거 당한다. 소설형식을 빌린 역사기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작가도 말한다. “등장인물들에 관한 역사기록을 기본으로 했고, 역사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자제했고,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세 여성의 삶이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면은 그들의 유복한 환경 때문이다. 허정숙의 아버지는 일제 때부터 세상이 다 아는 인권변호사 허헌이다. 고명자 부친은 판사다. 고명자는 몸종을 앞세우고 처음 청년동맹 모임에 등장할 정도로 끔찍이 애지중지한 고명딸이다. 주세죽은 착실한 기독교집안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만히 살면, 평생 호강할 수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까. 주세죽의 말이다. “내가 상해에서 너(허정숙)를 안 만났으면, 남편(박헌영)도 안 만났으면 지금쯤 함흥에서 음악선생 하고 있을까. 그동안 땅 밑이 꺼지는 것처럼 힘들 때도 많았고 죽고 싶은 적도 있었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바깥이 춥다고 껍질 속으로 도로 들어가겠니? 죽도 밥도 아닌 그런 인생은 생각도 하기 싫어.” 그렇다. 세상진실을 깨친 사람은 다시 과거로 갈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이 식민지 조국에서 편한 삶 대신 전적으로 자신의 신념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쭙잖은 내 감상보다는 작가의 탁월한 마무리 글을 옳기는 게 더 낫겠다. “세 여자와 남자들은 한겨울 영하 20도에 허술한 차림으로 서울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걸어서 갔다. 재산을 챙기기는커녕 있는 재산도 버렸고 애인도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도 버렸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생애로 겪어냈고 과학이라 믿었던 역사법칙의 오작동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온전히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작가도 세 여자들에게 지극히 애정을 쏟은 터라 소설을 쓰는 동안 비통해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도 읽은 후 느낌이 묵직하다. 세 여자의 생 속에는 식민지와 이념대결, 분단, 전쟁을 겪은 우리 선조의 삶이 고스란히 농축돼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도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20세기 초반에 그들의 인생은 지옥 속에서도 가끔 봄날이었다.” 작가의 노고와 작가를 통해 알게 된 세 여성에게 두 손 모아 합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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