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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강도인가?
성령강림 후 다섯 번째 주일설교문(19. 7. 14)
2019년 07월 15일 (월) 10:42:54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7 14) 성령강림 후 다섯 번째 주일
누가 10:25-37 “누가 강도인가?”


소성리와 김천에서 사드철회투쟁 하는 사람들은 예수살기를 다 압니다. 강형구장로님과 제가 예수살기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로부터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을 들을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 소감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살기를 통해 기독교를 다시 보게 됐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같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사드를 막기 위해 국가폭력과 부딪힌 고생을 함께 겪었고, 소성리 생활이 3년이나 되므로 이제는 한 식구 정서가 생긴 것입니다.

   
▲ 소성리 진밭교에서 기도회 하는 예수살기(19.04.17)
그렇게 느낀 일이 있습니다. 지지난주 수요일 극단 ‘함세상’에서 <하차>라는 공연을 했습니다. 극의 요지는 구르마꾼이 구르마를 끌고 가는데 짐이 너무 많아 고개를 넘기가 힘들어서 밀어줄 사람을 찾는 내용입니다. 그 때 한 사람씩 등장하는데, 구르마꾼을 돕기는커녕 허파 뒤집는 소리를 하는 풍자극입니다.(오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등장인물 중에는 목사도 나옵니다. 구르마꾼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르마 밀어주는 건데, 밀어줄 생각은 안 하고 교회 나오면 형통한다고, 복 받으려면 헌금을 잘 내야 한다는 등 요즘 교회세태를 노골적으로 풍자합니다. 모두들 웃으며 재미있게 봤는데, 연극이 끝나고 몇 사람이 말하기를, 연극에서 그 장면이 나올 때 내 기색을 살폈다고 합니다. 극에서 목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니까 내가 기분상하지 않았나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소성리에서 본 목사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닌데, 연극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내심 걱정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예수살기가 사드철회투쟁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에도 한 역할을 하고 있구나 느꼈습니다.

분쟁현장 주민들이 기독교 목사를 자기들과 한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 주 금요일 초복날, 변홍철씨와 삼평리를 갔습니다. 할매들이 수육과 추어탕을 끓여놓고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맛있게 먹고 이야기 나누는 데 면장이 직원들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복날 할매들께 인사한다고. 철탑반대 투쟁할 때는 면장이랑도 관계가 안 좋았는데, 면장이 인사하러 오는 걸 보니, 정권이 바뀐 현실이 이런데서 나타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면장과 처음인지라 서로 인사를 하는데, 면장이 자꾸 “목사님, 기도많이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하길래, 실상을 좀 알라는 뜻에서 2017년 7월 21일, 한전과 경찰의 기습침탈 이후 일어난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춘화아지매가 제 소개를 대신했습니다. 철탑공사 반대투쟁할 때, 주민이랑 똑같이 겪은 분이라고, 맞고 구르고 처박히고.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함께 했다고. 주민입장에서는 늘 소수인데, 목사가 같은 편에 있으니 너무 좋은 겁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유명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참 이웃의 전형입니다. 예수와 율법사 논쟁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율법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첫째는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둘째는 누가 내 이웃인가? 입니다. 매우 훌륭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주제는 훌륭하지만 율법사의 마음은 불순합니다.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합니다. 공동번역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나요? 아무리 고상한 주제도 취급하는 사람에 따라 더럽혀 질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진짜 영생 얻는 길이 간절한 게 아닙니다. 예수가 제대로 알고 있나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영생을 수단화했습니다. 영생이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자신을 바쳐서 겸손히, 간절히 도를 찾을 때 만나는 은총이며, 신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가장 고귀한 영역입니다. 거룩한 것을 구하려면 구하는 사람도 순수하고 고결해야 합니다. 레위기에서 제사장이 가장 우선하는 것은 자신의 성결입니다. 제사장이 불결한 가운데 바치는 제사는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깁니다. 율법사가 고작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거룩한 주제를 끌어다 대는 것은 영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오늘날도 거룩하고 순결한 단어를 엿장수 마음대로 끌어대고 남용하는 현상을 무수히 봅니다. 자신의 욕망실현에 수단으로 삼기 위해 거룩한 언어를 남발합니다. 누가 유난히 거룩한 말을 과도하게 인용하면, 일단 의심하는 게 좋습니다. 그만큼 은폐할 게 많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는 태도가 불순하고 정직하지 않은 율법사와 긴 말을 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적으로 응답합니다. 율법에 있다고, 너도 그렇게 하라고.
그러자 율법사는 한술 더 뜹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성서는 율법사가 그 질문을 할 때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라고.

어떻습니까? 율법사의 질문은 적절한가요? 실제 도움이 절박한 사람이 있는데, 그 절박한 실존을 외면하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그 이웃에게는 더 큰 좌절을 줍니다. 슬프게도 이런 서술이 일세기 율법사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무수한 종교업자들이 율법사와 같은 방식으로 이웃을 대상화합니다. 하지만 이웃은 자기 의를 과시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자기 몸처럼 섬기는 대상입니다. 예수는 율법사의 질문에 응합니다. 보통 예수는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비유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일세기 유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례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동선을 보십시오. 강도당한 사람과 같은 동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갑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할 일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만약 반대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면, 그들이 정결례를 의식해서 강도당한 사람을 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게 된 사람을 돕는다고 접촉했다가 정결례상 하자가 생기면 예루살렘에서 할 일이 차질이 생기므로 피했다는 변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므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즉 정결례에 대해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와줄 여건이 안 돼서 지나간 게 아니고, 처음부터 도울 마음이 없어서 지나간 것입니다. 피하면 간단합니다. 무사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기준에서만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요!

예수가 제사장, 레위인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제사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도덕률에 대해 일반 대중보다 높은 기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특히 강도당한 사람에 대한 처신도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는 깨졌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이제 죽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제사장, 레위인을 등장시킨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인접해 있고 조상이 같지만, 이방인보다 더 사이가 나쁩니다. 주로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멸시합니다. 기원전 8세기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하고 식민지일 때, 앗시리아 왕이 사마리아 사람을 쫓아내고 이방인을 대거 사마리아에 살게 했습니다. 그렇게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이 섞여서 이스라엘의 순수혈통을 더럽혔다는 혐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제사장 무리와 레위인들도 식민지 때, 가나안 땅 이방여자와 혼인해서 그들 풍습대로 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에 에스라가 크게 탄식하고, 정화운동을 일으켜서, 결혼한 이방여인들과 인연을 끊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도 다 내보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대로 살았습니다.(에스라 10장) 즉 유다인의 이방 혼혈혈통도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이방 여인에게서 난 자녀들은 또 얼마나 소외당했을까요!

도긴개긴이어서 유다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정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교의 모든 종파는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에게 당하는 멸시가 너무 혹독해서 자연히 두 종족 사이에는 벽이 쌓였습니다. 성전도 따로 지어서 예배도 따로 하고(요한복음에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나오는 그리심산 성전이다.) 서로 적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길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서는 그의 마음과 행동을 세분해서 자세히 서술합니다.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자” 구체적으로 행동합니다. 1)가까이 가서 2)그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3)싸맨 다음에 4)짐승에 태워서 5)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6)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추가비용까지 담보하며 온전한 구호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합니다. 정말 감탄스럽습니다. 잘난 척하는 율법사도 자신의 이웃개념을 깨뜨리면서 사마리아 사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구약성서 이웃개념은 넓었습니다. 마을이든 성읍이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사는 낯선 사람도 모두 이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신 논쟁과 율법해석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는 가운데 예수께서 나시기 전, 한 200년 동안에는 이웃 개념이 아주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정치종교상의 동지, 같은 당원 정도만 이웃이 됐습니다. 그래서 본래 율법에서 뜻했던,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율법사는 좁디좁아진 이웃개념에 사로잡혔다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하는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에 대한 자비실천이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의 계기는 길 가던 사람이 강도당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날 ‘누가 이웃인가?’ 이 질문을 오늘날 ‘누가 강도인가?’ 로 관심을 넓히겠습니다. 일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최고 강도는 민중을 발가벗기는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지배세력입니다. 유다인과 종교와 사회문화적으로 완전하게 차단된 사마리아 사람의 헌신은 크게 보자면, 같은 민중끼리 종족, 인종, 종교, 국가, 계급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거대악 강도에 맞서야 한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강도가 무엇인가요? 멀쩡한 사람의 생명과 재산, 행복권을 강탈하는 게 강도입니다. 오늘날 이 강도짓을 누가 대놓고 합니까? 불의한 자본과 권력은 끈끈한 유착관계를 맺고 법과 제도 뒤에 숨어서 여론을 통제하고 대중을 세뇌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 카르텔을 유지재생산 하기 위해 끊임없이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합니다. 안보와 국책사업 이름으로 자본과 권력은 국민의 땅과 재산을 빼앗습니다. 욕망만 가득한 마피아만의 이익을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행정부는 실행을 하고 사법부는 그 강도짓을 정당화 시켜준다. 빼앗는 자본은 이익을 보장받고 저항하는 사람만 탈탈 털립니다.

예수살기가 집중하는 현장투쟁만 봐도 누가 강도에게 당해서 신음하는지 명확합니다. 사드배치로 인해 작게는 소성리 민중이 신음하고 크게는 대한민국 전체가 분쟁의 소용돌이가 됐습니다. 청와대 분수대 앞에는 매일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항의일인시위를 합니다. 어제가 580일째입니다. 피켓 내용은 이렇습니다. "토지강제수용"은 합법을 가장한 공권력의 "강압적 토지수탈"입니다. 민간사업자를 위한 토지강제수용은 국가폭력입니다. 합법으로 포장한 공용수용제도는 반드시 개선해야합니다." 집회에서는 땅을 빼앗긴 민중의 호소가 절절합니다.

복음말씀은 강도당한 이웃을 구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오늘 강도당한 이웃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근원을 고치지 않고 증세만 치료해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나라가 더욱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그 바탕 위에 서도록 민주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최선입니다. 우선 신음하는 이웃과 같은 편에 서십시오. 그들을 지지하십시오. 후원하고 외치고 시위하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렇게 영생을 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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