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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은 한 명에서
성령강림 후 일곱 번째 주일설교문(19. 7. 28)
2019년 08월 01일 (목) 11:26:18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9. 7. 28) 성령강림 후 일곱 번째 주일
창 18:20-32 “열 명은 한 명에서”


어제는 정전협정 66년 되는 날입니다. 1953년 7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 미국이 한국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한 날입니다. 정전협정은 임시협정입니다. 4조 60항에 정전협정 대신 완전한 평화협정을 맺는 회담을 곧 열자는 내용이 나옵니다.
“60.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 백창욱님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합니다. 이승만과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할 마음이 손톱만치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정치회담은 삼 개월 후가 아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6월까지 스위스 제네바에 열리긴 했지만, 회담결과는 결렬입니다. 미국의 사보타지에 휘말려 회담은 지지부진하다가 아무런 합의도 못하고 다음 회의날짜도 잡지 못한 채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66년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이 기형적인 임시협정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구축을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이 시급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치감치 평화협정을 맺자고 줄기차게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2005년 9월, 6자 회담, 9.19 공동선언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별도의 논의를 하기로 6개국이 합의했습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은 그 선언을 기반으로 민간차원에서 평화협정 체결운동을 벌였고 대구평통사 대표였던 저도 이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공안은 평화협정 체결운동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었습니다. 이유는 북한과 같은 주장을 하므로 이적행위라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도 2012년 9월 압수수색을 당하고, 2013년 12월 30일 기소돼서 2017년 12월 5일 대법원 무죄판결 받기까지 4년을 재판으로 시달렸습니다. 우리 민족은 분단을 극복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눈먼 돈으로 소모되는 분단비용만 줄여도 국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선 남북이 협력해서 화해와 평화를 누리고 교류하다가 때가 되면 통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제 최진웅씨가 올린 황경민씨 칼럼을 보며 크게 공감했습니다. 황경민씨는 부산에 있는 인문학 공간인 헤세이티의 대표입니다. 헤세이티는 입간판에 기발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글 서론을 인용합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나서서 ‘애국이냐 이적이냐’ 선택하라고 ‘강요’했을 때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실체도 없는 국가(주의)에는 애국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고, 내게 있어 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그 모든 세력이니 이적도 할 수 없다고…. 그럼 내게 적은 누구인가? 일본의 아베 총리이고, 자유한국당이며, 자본가이고, 민중보다 자본가를 위하는 더불어민주당 정권이고, 국가적 민족적 분열을 부추겨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고 권력에 빌붙은 지식인이며, 그 분열로 이익을 얻는 세력이다.”

핵심을 찔렀습니다. 일본과의 갈등에서 한국인으로서 문재인 정권 편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개운치 않습니다. 칼럼에서도 말하듯이, 노동자보다 자본가를 위하는 정권의 노동홀대 때문입니다.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씨는 서울 강남역 네거리 폐회로티브이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 중입니다. CCTV 철탑은 몸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좁은 공간인데 그곳에서 농성 48일째이고 단식 55일을 넘었습니다. 김용희씨는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삼성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다가 1995년 부당해고당하고 24년이 흘렀습니다. 고공 농성하던 중인 7월 10일, 자신의 생일날, 정년이 돼서 복직요구도 사라졌습니다. 김용희씨는 삼성의 사과와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밥은 물론이고 물과 의료진료까지 거부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행히 어제 내려가지 않는 대신, 단식을 풀기로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권의 책임자들은 한 노동자의 생사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연대하는 시민들과 인의협 의사들만 애가 타서 동동거렸습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돌아보지 않는 시대는 정의로운가요? 불의한가요? 그것 아니라도 신경 쓰고 대처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해고노동자 한 명을 돌아볼 겨를이 어디 있는가 하고 효율성만 따지는 권력은 그 효율성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소돔성이 멸망한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근본주의 교인들은 소돔성 심판의 원인을 동성애 때문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틀린 해석입니다.
소돔성 멸망의 이유에 대해 저의 변증과 성서의 변증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창 18장은 아브라함이 나그네 셋을 극진히 대접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알고 봤더니 그 나그네들은 하나님과 천사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 일행인 것을 알기 전부터 매우 공손하고 신속하게 최고급의 요리로 환대합니다. 덕분에 아브라함은 주님께로부터 아들을 점지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대접에 최선을 다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반면 롯을 보십시오. 창 19장입니다. 롯도 나그네를 대하는데 정성을 다합니다. 엎드려 청하고 간절히 권하여 집까지 모십니다. 그런데 식사대접이 이상합니다. “누룩 넣지 않은 빵을 구워서 상을 차려주었다.”(창 19:3)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누룩없는 빵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때나 선조들의 고난을 기억하여 먹는 음식입니다. 아브라함이 고운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굽고 젖과 우유, 기름진 송아지를 요리해서 대접한 것과는 큰 차이입니다.

롯이 형편이 어려운 집도 아닌데 왜 식사대접에 인색할까요. 소돔성이 나그네를 대하는 풍토에 자신도 모르게 물들었습니다. 아무리 롯이 의인이라도 삶의 환경에 물들 수밖에 없습나다. 소돔성의 나그네 대접 풍토는 어떤가요? 급기야 롯의 집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몰려와서 롯의 집을 둘러쌌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기 위해 몰려온 것이면 좋을 텐데, 정반대입니다. 얼마나 위압적이겠습니까.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창 19:5)

근본주의자들은 이 대목을 가지고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심판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대목이 동성애로 보이나요? 근본주의자들은 성서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받는 게 아니고 자신들의 주장을 진리라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는 이단사이비만큼 신앙을 해칩니다. ‘상관하겠다’는 말은 동성애가 아니고 한 쪽이 위력으로 다른 한 쪽을 성폭행 하겠다는 말입니다.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는 어마어마한 모욕입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다 범죄행위입니다. 소돔성은 고대문화의 최고미덕인 나그네 환대를 노골적으로 깼습니다. 소돔 성 모든 남자가 죄다 몰려 나와서, 나그네를 성노리개로 삼으려고 야욕을 부릴 만큼 전체가 타락했습니다.

성서는 소돔성의 죄를 무엇이라고 하나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1절)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두 예언자가 소돔의 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 끔찍한 일들을 보았다. 그들은 간음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도와서, 어느 누구도 죄악에서 떠날 수 없게 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소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루살렘의 주민은 고모라 백성과 같이 되었다.”(렘 23:14)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겔 16:49)

소돔성에서 울부짖는 소리의 정체는 두 예언자의 진단대로 유추하면,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발가벗겨서, 정의가 사라지고 오직 힘 있는 놈들의 욕망과 폭력대로 돌아가는 악한 사회에서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신음과 원성입니다. 나그네를 비롯한 약자들을 학대한 죄가 성 전체에 펴졌고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그 죄악이 오랫동안 쌓인 고로 성 사람 모두가 멸망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경에는 이스라엘이 보호해야 할 사회약자로 고아, 과부, 나그네가 항상 고정돼 있습니다. 이 성서말씀이 소돔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도 소돔에 버금가는 중죄를 짓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소돔성 멸망이 동성애라는 엉뚱한 진단을 버리고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한 강자들의 욕망과 폭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의 욕망을 제어하기는커녕 나도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못된 짓을 따라하다가는 우리도 소돔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여섯 번의 간청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요? 아브라함은 의인 쉰 명을 의인 열 명으로 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계속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의인의 보존을 구합니다. 비록 악이 창궐한 도시라 할지라도 의인까지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열 명까지 간 이유는 열 명은 집단에서 가장 적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의를 봅니다. 누가 의인인가요? 의인은 모든 가치와 판단 기준이 의에 있습니다. 자기를 넘어서 의를 구합니다. 공동체가 불의를 버리고 의롭게 살기를 부단히 구합니다. 아브라함의 의로움은 소돔을 구하는 기도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자기 체면만 생각하면 여섯 번까지 구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소돔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기도가 퇴색하는 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인이 있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개벽하고 민중이 원하는 세상이 성큼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의인은 악에 굴복하지 않고 부단히 정의를 외칩니다. 의인의 분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 의인은 몇 명쯤 될까요? 누가 의인인가요? 질문을 바꿔서, 우리 세상은 심판에 가까운가요, 지속가능에 가까운가요? 마침 어제 성서노조 위원장이 김용희씨 연대갔다가 그의 짧은 연설을 녹음했습니다.
“여러분 덕에 눈물나게 고맙고 감사하다. 극단투쟁 이해해 주시라. 저는 개인싸움이 아니다. 삼성의 80년 역사 안에서 투쟁한 동지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운동판을 떠났다. 저도 노조포기 안 한다는 이유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았다. 삼성건물 옥상의 나무 한 그루만도 못한 노동자의 처지가, 삼성윤리의식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초일류기업이라는 명판을 달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이게 나라인가 싶다. 여기에 올라왔을 때는 삼성문제 해결 안 되면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동지들 보고 마음을 바꿨다. 살아서 끝까지 싸우기로. 삼성에 여섯 개 계열사가 있는데 노동탄압이 희석되고 있다. 삼성 안에 노동이 뿌리내리도록 남은 인생 바칠 것이다. 삼성은 내 목숨 끊는 것을 바라는데, 보란 듯이 살아서 삼성의 범죄행각을 사회에 알려내겠다. 그때까지 지켜봐 달라”

삼성이라는 거악에 맞서 정의를 구하는 김용희씨를 통해 오늘의 의를 봅니다. 의인은 자기를 던져서 의를 구합니다. 이를 보건대, 사람의 양심과 정의를 향한 의지는 악의 힘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결코 억누를 수 없습니다.

누가 의인 열 명이 되나요? 권력과 자본이 획책하는 거대악에 휩쓸리지 않고 사람세상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 때 한 명은 열 명이 되고 열 명은 백 명이 되고 마침내 악을 거꾸러뜨리는 새로운 바람이 됩니다. 열 명은 한 명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그 한 명이 되면 또 다른 한 명과 만납니다. 그렇게 열 명이 되면 우리 사회를 구합니다. 열 명이 없다고 포기하거나 한탄하지 말고 내가 그 한 명이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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