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논평 환경/기술 지역/농업 전통/문화 미디어/사람 정보/게시판
  편집: 2019.9.18 수 09:56
> 뉴스 > 전통/문화 > 역사전통 | 착한여행
     
자연속 고택의 향기 '녹우당'
해남 '고산 윤선도' 종택과 유물전시관을 찾아서
2011년 08월 21일 (일) 23:14:18 류기석 yoogiseo@yonsei.ac.kr

조선 중기 끊이지 않는 당파 싸움 속에서도 외로이 선비의 절개를 지킨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는 1587년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생부 윤유심(尹唯深)과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한옥으로 자연과 조화가 돋보인 풍경

그러나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간다. 이후 관찰공(觀察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문화해설사의 윤두수 시서화 설명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과 유물전시관편, 문화해설사의 명강의

서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맞아 해남에 살던 윤선도는 의병을 일으키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윤선도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네이버 백과사전은 전한다. 

최근 포천에서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기행을 가는 길 위에서 해남읍 연동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과 해남 윤씨 종가를 찾았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과 유물전시관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과 유물전시관

전남 해남군 해남읍 종가 부근에 건립된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자연 채광과 외부조명을 최대한 살린 한옥 양식으로 잘 지어졌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이 돋보인 것은 녹우당 고택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지상 1층은 전통 한옥의 외형을 했고, 지하 1층은 유물 보존을 위한 안전하고 현대적인 전시 시설과 영상관, 수장고 등을 갖추는 배려를 했다는 점이다.

한옥으로 된 1층 특별전시실을 들어서는 순간, 문화해설사의 친절한 안내가 압권이었다. 윤두서를 비롯한 낙서 윤덕희의 수묵화의 세계를 감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모아 특별전으로 마련된 것이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전경

또한 제1전시실에는 해남윤씨가의 학문과 예술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고문서, 그리고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관에는 고산 윤선도와 관련된 고문서와 유물이, 회화실에는 공재를 비롯하여 3대 화가를 배출한 낙서 윤덕희와 윤용의 그림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국보 240호로 지정된 ´공재 윤두서 자화상´ 진품을 비롯해 해남윤씨 녹우당 종택의 유물 4천6백여 점을 소장했다고 하니 해남 방문시 한 번쯤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특히 1602년(선조 35년) 6월 2일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인 윤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윤유기(尹唯幾)에게 양자로 입양할 것을 신고하여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를 그곳에 가면 직접 만나볼 수 있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 500년된 은행나무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과 주변

이번 녹우당 방문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박물관 안이 아닌 밖에 펼쳐진 옛 종가의 숨결이다. 신록이 우거진 오래된 고택 하나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며 걸었던 발걸음으로 정이갔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 자리중 하나라는 '고산 윤선도의 종택 녹우당'은 덕음산을 배경으로 야트막한 경사위에 자연과 더불어 그저 그렇게 너른 터에 자리잡고 앉았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의 녹우당

녹우당이란 이름을 짓게 된 연유는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 숲과 관련이 있단다. 녹우당은 "비자나무 숲에서 일렁이는 바람소리가 비 내리는 소리와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17대 왕인 효종은 그의 스승인 윤선도에게 경기도 수원에 녹우당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윤선도는 말년에 수원에 있는 녹우당을 해체하여 자신의 고향 해남군 연동으로 옮겨지었다. 현재 사랑채가 옮겨지었다는 부분이다.

해남 윤씨 종택 초입에는 종가와 세월을 함께 한 500년 된 은행나무가 서있고, 안채와 사랑채에 들면 유서깊은 고산 윤선도의 삶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곳에는 14대 종손이 아직까지 거처하고 있다고 한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 추원당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 독특한 건축양식의 추원당 안채

사랑채를 지나 나가는 길에 양반집에서만 키운다는 400년된 '회화나무' 일명 학자수도 볼만하다. 평상시의 윤선도에 대한 느낌이 없었는데 이곳을 오고간 이후 '오우가'나 '어부 사시사'로 유명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윤선도식 삶의 스케일이 오래 기억된다.

시, 서, 화에 뛰어난 대표 문인인 동시에 의약에도 그 지식이 남다른 점, 풍수지리에 있어 혜안이 남달랐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점이다. 어쨌거나 해남 윤씨 종택은 긴긴 세월동안 남에게 해를 입지 않았으니 명당이다.

   
▲  해남윤씨 고산(윤선도) 종택, 울창한 비자림 숲을 거닐며...

사실 해남 윤씨 집안의 조상들은 자연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 같다. 해남 윤씨의 문중 자료를 찾아보면 "뒷산 덕음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하여 비자나무 숲을 조성, 지금은 천연 기념물 제 24호가 됐다고 한다.

현재 녹우당을 포함 해남윤씨 종가는 1만 여평의 집터에 50만평에 달하는 주변 땅(비자림 포함)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류기석의 다른기사 보기  
ⓒ 새마갈노(http://www.eswn.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지렁이 같은 야곱 찾아
그리스도의 기술
5대 종단 종교 화합의 걸음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날마다 은혜와 기적을 체험
회개, 참 사람의 길
회개하는 한 사람
그레타의 편이 돼 주세요
진보운동계의 자아성찰서
『둥글이, 싸움의 철학』 나는 이 책을 펴기 전에는, 둥글이가...
나를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거나
비상시, 브레이크 댄스를 추시오
한국교회 지붕 햇빛발전소 설치를 ...
9월 3일(월) 오후2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교...
신재생에너지로 90% 전력공급 가...
독자 설계 잠수함 건조
'돈의문박물관마을' 13개 프로그...
서울시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시민이 직접 제안하고 진행하는 13개...
헬조선을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포천 평화나무농장 생명역동농업 산...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384-19, 성도빌딩 5층 | 전화 : 02-747-3191 | 편집인 010-8413-1415 | 제호 : 새마갈노
등록번호 : 서울 아03061 | 등록일 2014.03.24 | 발행인 : 양재성 | 편집인 : 류기석 | 청소년보호책임자 : 류기석
Copyright 2009 새마갈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sw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