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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을 생각하며(3)
시급한 경운궁(慶運宮) 태묘(太廟) 환원의 진실
2012년 01월 20일 (금) 11:45:04 김민수 ssk0102@hanmail.net

 

   
▲ 역사연구가 김민수님
1897년 10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건국(建國)한 근대적 자주독립국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가 1899년 8월 17일 반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령 발포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條約) 체결권·선전 강화권·사신 파견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제국 황성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강점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고 독도를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여 1900년 10월 25일 고조 광무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 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하였다.

1909년 9월 간도 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 늑결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이범윤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했다. 1905년 11월 17일 늑결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자 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907년 7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네덜란드에 특사(特使)로 파견했고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일제가 강제한 을사늑약을 폭로하려 했던 고조 광무제의 계획은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대한제국 대표들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 이위종 특사의 '대한제국을 위해 호소한다'는 연설은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 20일 고조 광무제를 무력 동원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 황실 황위 승계 서열 1위 의친왕 대신 어린 영친왕을 영친왕비 민갑완(閔甲完)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7월 24일 군대 해산,사법권·경찰권의 위임,법령권 제정·관리임면권 간섭하는 정미늑약(丁未勒約)을 늑결했다.

1910년 8월 16일 일제 통감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경술늑약안을 밀의(密議)하고 18일 내각회의에서 경술늑약안 합의를 보게 한 후 22일 대한국 황제가 불참한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치게 하고 29일 한일 병합을 공포하였으나 통감부(統監府)가 조약 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술늑약(庚戌勒約) 처리를 강행했으며 대한제국 조약 체결권자 고조 광무제의 조약 체결 친필 서명없이 일제 통감부가 조약 관련 주요 문서들을 위조(僞造)하였으므로 경술늑약(庚戌勒約)은 불법 무효하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건국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0년 황자(皇子) 의친왕(義親王), 영친왕에게 친왕(親王) 책봉(冊封)하였다.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명성황후 민씨,귀인 장씨,귀비 엄씨,귀인 이씨, 소의 이씨,귀인 정씨,귀인 양씨 등 총 7명의 황후,후궁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皇子)들이 있었고 고조 광무제와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경운궁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9년에 대한제국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했다.

제정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은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의 후손인데 의친왕(義親王)과 10여명의 후궁 사이에 13황자 9옹주가 있으며 공주는 없었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冊封)되었으며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의친왕(義親王)은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친일파가 득세하여 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황태제 책봉이 되지 못하였고 1910년 8월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간도의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붕어(崩御)하였다.

대한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 의친왕을 3대 황제로 추숭하여 태묘에 부묘하고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제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한다.

대한제국 고조(高祖) 광무제는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하였으며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무효이고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9월 상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 후 득세한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던 귀인 엄씨이고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되고 택일하여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토 일제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된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과의 가례를 기다렸으나 일제의 방해로 영친왕비(英親王妃)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1912년 동제사(同濟社) 조직,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결성,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조직,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 등 대한광복운동이 조직화되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하자 일제 총독부가 고조 광무제를 독살했다.

전제군주제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高祖) 광무제는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고 영친왕비(민갑완) 9등 적의는 1906-7년 영친왕과의 가례를 위해 다른 황족의 적의와 함께 궁내부 직조과(宮內府 織造課)에서 제작되었다.

1910년 8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불법 무효이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민주공화정으로 전환되어 대한제국 황제의 치세는 1919년 4월에 끝났으며 심청색 이화문 적의(翟衣)는 대한제국 황후,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이며 조직적인 대한광복운동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가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촬영한 적의는 1922년 일본 교토에서 제작한 것이다.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하고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릉에 합장(合葬)해야 한다. 고궁박물관은 제왕기록실과 대한제국실의 대한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 광무제(1897-1919.1),2대 순종 융희제(1919.1-4), 황태제(皇太弟) 의친왕,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으로 바로 기술하여야 하며 대한제국실의 영친왕비 사진을 민갑완으로 교체하고 왕실생활실의 심청색 이화문 9등 적의(翟衣)를 대한제국 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한다.

1909년 1월 7일 목요일 오전 6시 40분 대한제국 황태자(1919년 1월 2대 황제 등극한 순종 융희제)는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統監)에 의해 대한제국 불법 병합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비밀리에 계획되었던 순행(巡幸)을 위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으며 보신각을 지나 경운궁에 들러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게 문안을 드린 황태자는 7시 30분 경운궁 대한문을 나와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남대문역 주변에는 정부 관료와 사회 인사, 관립학교 학생들이 운집하여 황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8시 10분, 황태자는 환송을 받으며 궁정열차에 탑승하였고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統監)의 간계(奸計)로 6박 7일로 예정된 동남 순행(巡幸)의 시작이었으며 대구, 부산, 마산 등지를 순행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국왕이 도성 밖을 나와 행차하는 경우는 선대 국왕과 왕비의 능침에 가는 능행(陵幸), 사친(事親)의 묘소에 가는 원행(園幸),질병의 치료를 위해 온천에 가는 온행(溫幸) 정도였고 한성에서 멀지 않은 경기 지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순행(巡幸)이 아닌 피난의 경우에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경상도 남해안까지 행차했던 국왕은 없었으므로 대한제국 황태자의 동남 순행(巡幸)은 전례가 없는 일이며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統監)에 의해 비밀리에 계획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강제 퇴위시킨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본의 무력을 동원한 대한제국 불법 침략이 아닌 대한제국의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하고 있음을 한국인에게 선전할 묘안을 강구하였고 대한제국 황태자가 지방을 순행(巡幸)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일제 통감부의 강박)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 즉위(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이 황제 양위로 둔갑)로 왜곡,선전하였다.

서북 순행(巡幸)은 1907년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킨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대한제국 황태자가 지방을 순행(巡幸)하며 통감부가 대한제국 침략이 아닌 대한제국의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하고 있고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일제 통감부의 강박)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 즉위(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이토 통감이 황제 양위로 둔갑)를 왜곡,선전하였다.

대한제국 황태자(순종 융희제)는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統監府)의 간계(奸計)로 1909년 1월 27일부터는 서북지방으로 순행(巡幸)했다. 약 1주일간의 예정으로 개성을 거쳐 평양과 신의주 등을 순행한 황태자는 2월 3일에 한성으로 돌아 왔다.황태자의 서북 순행(巡幸) 시 일제가 강요한 일본 국기 게양에 대해서 대한국 국민들은 극렬히 반대하였고 서북지방인 황해도,평안도지방에서는 대대적인 일장기 거부사태가 일어났다.

평안도 의주군에서는 일반 국민과 학교에서 일장기를 달지 않기로 결사 항거하였고 관찰사와 부윤 등이 순사(巡査)들을 보내어 위협하면서 일장기를 억지로 내걸게 하였으나 큰 저항에 부딪쳤으며 일장기 게양에 앞장 서서 반대한 비현면의 극명학교(克明學校) 교사인 이정근, 박형권 두 사람은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당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서북 지방 대한국 국민이 모두 '우리 머리 위에는 5천년 창창한 역사이래 변치않는 대한제국의 하늘을 이고 있고 우리 발 아래에는 4천리의 대한제국 땅을 밟고 두 눈에는 대한제국의 해와 달을 우러러 보며, 몸에는 대한제국의 비와 이슬을 맞는 대한국민으로 금일 우리 황태자(皇太子) 전하께서 우리 지방을 순행(巡幸)하사 우리 민정을 두루 살피시는 이 때 우리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만 달리라'하고 '대한제국 만세'의 외침이 길게 울려퍼지니, 장하도다 동포의 정신이여! 개성에서 시작하여 의주에서 그치니 무릇 1천여 리 사이에 대한국민이 의논하지 않았으되 한 뜻을 이루어 서로 통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대한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봄 ,여름,가을,겨울의 4시(四時),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영절(令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치,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수복방, 수라간, 비각, 망료위,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금천교 안쪽 좌측에 규모가 큰 재궁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고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되어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2대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 그리고 순정황후 윤씨(純貞皇后 尹氏)의 능이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一 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홍전문까지 문인석·무인석,기린·코끼리·해치·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중앙에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으며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 남아 있다.

서울시,경기도, 강원도에 소재한 조선시대(1392년-1897년) 506년 동안 존속된 25대 국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국왕과 왕비의 릉 및 대한제국시대(1897년-1919년) 황제릉을 조선 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였는데 문화재청은 연조(燕祖),광조(光祖) 묘호(廟號) 추존 및 왕릉 능제 격상, 완친왕릉 능제 격상,영친왕릉에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하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의 능제를 격상하고 황제릉 능호를 부여하여야 하며 조선 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을 구분하여 재지정하고 교육홍보하여야 한다.

1897년 10월 12일 고조(高祖)가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1대 광무제로 등극하여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어새(皇帝御璽),황제지보(皇帝之寶),칙명지보(勅命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시명지보(施明之寶),대원수보(大元帥寶),원수지보(元帥之寶)를 새로 제작하였다. 러일전쟁을 예견한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독일,이탈리아,러시아 황제,프랑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일제가 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프랑스 대통령,독일,러시아,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2 종류인데,한 종류는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다른 한 종류는 1906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 있다. 대한제국 초기에 제작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1903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국새(國璽)ㆍ어새(御璽)는 내대신(內大臣)이 관리하는 것이나 러일전쟁 발발 징후 등 대한제국의 정치적인 상황때문에 고조 광무제가 국새를 비장(秘藏)하였다.

대한제국 황제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궁중 길상(吉祥)장식화인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는 5대 명산 5악(五嶽:백두산·묘향산·금강산·계룡산·지리산)과 붉은 해, 흰 달, 붉은 소나무,계곡 폭포수,강의 파도를 그린 그림이며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 부른다. 경운궁 중화전 등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에 놓았고 황제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황제의 신위를 모신 혼전(魂殿)에도 두었다. 절대 황제권을 상징하므로 황제가 임어하는 곳에 항상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가 있으며, 주로 병풍 위에 그려놓아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 이른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은 8폭의 병풍 형태로 된 것과, 별도의 받침대에 끼워서 세우는 대형 가리개 형태로 된 것이 있다.

진전(眞殿)에 어진(御眞)을 봉안할 때에는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정면에 세우고 양쪽 옆에 한 폭으로 된 작은 병풍을 2중으로 세우기도 했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왼쪽에는 흰 달이, 오른쪽에는 붉은 해가 떠 있고, 가운데에 녹색과 청색으로 채색된 5대 명산, 5악이 솟아 있다. 양쪽 계곡에는 폭포수가 쏟아지고, 5악(五嶽) 아래는 반원꼴의 물결과 파도가 큰 강을 이루고 있으며, 양쪽 구릉에는 붉은 노송이 두 그루씩 서 있다. 붉은 해는 대한제국 황제를, 흰 달은 황후를, 5악(五嶽)은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대한제국의 5대 명산 5악(五嶽)을 그린 것으로, 황제가 통치하는 제주도에서 간도까지 4천리 영토를 상징하며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이고 소나무는 충성스러운 대신을, 폭포수,강물은 백성을 의미한다. 대한제국 황제는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하는 천자이며, 황제가 통치하는 4천리 영토는 음양오행의 작용으로 태평성대를 이루고 해, 달, 5악(五嶽), 소나무, 폭포,강물은 천계(天界), 지계(地界), 생물계의 영원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 만대까지 번창하라는 의미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아버지 민치록의 소유의 한성 감고당에서 살았으며 1866년 왕비로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지내다가 왕비로 책봉되었다.1873년 11월 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1876년 병자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했다.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했다. 명성황후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조미수교 주선, 후원을 부탁했고 이동인(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밀명을 내려 일본에 파견,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조미수교를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1882년 구식 군대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여흥 민씨(驪興 閔氏)들이 살해당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는 홍계훈(洪啓薰)에 의해 이천,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했다가 여주로 숨었다.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되어 1개월 만에 고조 광무제는 복권하였고, 명성황후는 한성으로 돌아왔다.1884년 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여흥 민씨(驪興 閔氏) 상당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살생부에 올라 살해됐고 조카 민영익만 미국인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건졌다.명성황후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해 개화당을 붕괴시킨 후 러시아에 접근했으나 영국이 1885년 거문도를 강제 점령하고 청나라도 흥선대원군을 돌려보냈다.

청일전쟁을 일본이 승리한 직후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렸으며 명성황후는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 이토 일본 총리는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명령하여 1895년 8월 20일 일본 군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침입하였으며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발가벗겨 제보받은 신체적 비밀을 확인한 후 칼로 베어 살해하고 시신을 녹원(鹿苑)에서 소각했다.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한 일본군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친일파의 협조하에 건청궁으로 침입, 명성황후를 살해하였고 훈련대의 1대대장 이두황, 2대대장 우범선, 3대대장 이진호가 일본군에 협력했다.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 이어를 결정하게 하였고 을미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1897년 10월 대한제국 건국과 함께 명성황후(明成皇后)에 추책되었으며, 국장을 치르고 청량리에 장례되었다가 경기도 남양주 홍릉으로 천장되었다.

명성황후를 4회 만났던 영국인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에서 명성황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고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그녀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묘사하였다.문화재청 고궁박물관은 장도빈(張道斌)이 펴낸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을 전시,교육홍보하여야 한다.

1904년 2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고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1897-1919)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을 통한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노골화했고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독점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 늑결을 강요했다.

일제(日帝)는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을 위해 고조(高祖) 광무제에게 협박을 거듭했으나 불응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고조 광무제가 불참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이토 통감은 을사5적(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統監府)는 대한 황실 궁내부(宮內府)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여 대한국 정부가 소유,관리하던 국유재산인 황실문화재를 교육기관,연구기관,문화기관과 외국에서 불법 소장중이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1일 대한 황실이 창경궁(昌慶宮)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일제 총독부에 의해 대한제국 문화재 조사 수집 또는 강제 기탁 불교문화재,도굴 및 구입 장물과 함께 경복궁,경운궁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불법 반출 또는 중앙박물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고궁박물관은 황실박물관(Imperial Museum)으로 개칭하고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외국으로 불법 반출 후 환수하였거나 불법 이관되어 교육기관·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KOREA·태극기·애국가·대한국국제·국새·칙령(勅令)·실록·의궤·일기·등록·법전·어찰·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독도(獨島)·간도(間島) 및 도성궁궐도·대한 황실 및 궁궐 유리원판 사진 등 대한 황실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대외관계실을 신설하고 통치체제실을 확대개편하여야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KOREA,대한국국제,태극기,애국가,국새,어보,칙령,실록,의궤,일기,등록,법전,어찰,백자,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독도(獨島)·간도(間島)·도성궁궐도, 궁궐 및 대한 황실 유리원판 사진,황실 복식,환구제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국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안전 관리하고 전문가 및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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