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논평 환경/기술 지역/농업 전통/문화 미디어/사람 정보/게시판
  편집: 2019.8.21 수 16:47
> 뉴스 > 전통/문화 > 역사전통 | 북(北) 역사
     
나라굿당집 '금성당'을 아시나요 ?
김민수의 조선시대 되짚어 보기(4)
2012년 09월 24일 (월) 13:30:01 김민수 ssk0102@hanmail.net

관자(貫子)

   
관자(貫子)는 망건(網巾)의 좌우에 달아 당줄을 꿰어 거는 지름 1.2cm 내외의 작은 고리로 권자(圈子)라고도 한다. 망건편자의 귀 부근에 달아 망건을 졸라매는 띠인 편자 끝에 있는 좌우의 당줄을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하는 것이지만 관품(官品)에 따라 재료나 새김장식을 달리 하여 신분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새김장식에 사용된 무늬는 주로 꽃·대나무·연꽃 등이다. 경국대전에 1~3품의 당상관은 금·옥을 사용하였으며, 3품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뼈·뿔·대모(玳瑁)·호박(琥珀)·마노(瑪瑙) 등을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품은 만옥권(漫玉圈) 속칭 옥환(玉環)을 하였고, 2품은 견우화(牽牛花)·매화·오이꽃 모양의 금권(金圈:금관자)을, 3품은 견우화·매화 모양의 옥권(玉圈:옥관자)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는 1품은 새김장식이 없는 작은 옥관자(민옥관자·도리옥), 정2품은 새김장식이 없는 소형 금관자(도리금), 종2품은 새김장식이 있는 대형 금관자, 정3품은 새김장식이 있는 대형 옥관자, 당하3품 이하 서민은 뼈·뿔·대모·마노·호박 등을 사용하였으며, 상인(喪人)은 우제(牛蹄:소발굽)를 사용하였다.

금성당(錦城堂)

금성당(錦城堂)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된 어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세운 한옥 나라굿당집이며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고 1880년대 초반 이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물 형식은 전면 3칸에 서쪽으로 2칸을 붙여 지은 역 ‘ㄱ’자형이다. 본당 안쪽에 다락방이 붙어 있었으나 촛불이 넘어져 불이 나는 바람에 다락방 부분이 없어졌다. 그때 다락방을 대신하여 방 1칸을 다시 지었다. 본당 정면은 하나로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4짝의 격자 문살 분합문(分閤門)을 좌우로 달아 접어올려 위로 고정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금성대군의 탄신일인 음력 3월 24일에 시루떡 등으로 공양을 올린다. 19세기 무속신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전통적 당집 양식의 무속 관련 건축물 금성당은 충렬화주당, 왕십리수풀당과 함께 무가에 자주 등장하는 사외삼당(私外三堂), 즉 도성 밖에 있는 성황당의 하나이며 안에는 금성대왕, 삼불사 할머니, 별상님 등 무신도 8점과 각종 무구류(巫具類), 무복(巫服), 제기와 실제 무속 의례에 사용한 물품이 많이 남아 있고 고조 광무제의 탄신일에 돈 7백 냥을 내렸다는 명성황후가 황태자를 위해 명산대천 및 성황당에 치성드린 물품의 목록과 궁궐 안의 각 전각에 고사지내는 물품목록인 위축발기(爲祝件記)문과 고조 광무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전패(殿牌:임금의 어진을 대신하는 목패)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대한제국 황실의 굿당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차(御車)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어극(御極)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협률사(協律社)에서 열었으며,경운궁(慶運宮)부터 협률사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Ford) A형 무개차(無蓋車)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했다.

1902년 어극(御極) 40주년을 맞은 고조 광무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나라 잔치를 콜레라의 발병으로 1903년 협률사(協律社)라는 극장에서 열게 되었으며, 칭경식(稱慶式) 기념 공연을 위해 8도 광대들과 미기(美妓)들을 뽑아 미리 장악원(掌樂院)에서 풍악과 가무를 연습시켰다.

미국인 알렌을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어차(御車)로 수입하였다. 알렌은 1884년 대한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어의를 지냈다.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는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남대문역에서 내려서 경운궁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였다.황제의 행차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어차(御車)는 시끄럽고 빨리 달려 고조 광무제 행차에는 사용하지 못하였다.

1908년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 프랑스제 르노 리무진이 대한 황실 의전용으로 수입되었고 1910년 미국제 GM 캐딜락 1대를 더 수입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어차(御車)를 타고 행차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1910년부터 대한 황족의 어차(御車) 행차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하며 순종 융희제가 미국제 GM 캐딜락 리무진을,순정황후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을 애용했다. 순종 융희제 어차(御車)는 미국 GM사가 제작한 문이 4개인 7인승 캐딜락 리무진으로 목제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하여 진한 밤색을 띠며 황실 문장인 이화(李花) 문양의 금도금으로 곳곳을 장식하고 내부는 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치장했고 의자는 자유롭게 접거나 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배기량은 5153cc이다.

순정황후 어차는 영국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으로 목제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하여 진한 밤색을 띠며 황실 문장인 이화(李花) 문양의 금도금으로 곳곳을 장식한 문이 4개인 7인승 리무진이다.

성락원(城樂園)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義親王)의 별궁(別宮) 성락원(城樂園)은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고 엄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안뜰은 본재누각(本齋樓閣) 영벽지(影碧池) 폭포가 있으며, 생활 수학 수양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영벽지(影碧池)는 인공이 가해진 자연 연못의 진수를 보여주며 여기에 비치는 그림자는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뒤뜰은 송석(松石)과 연못이 있는 건물군 뒤의 후원으로 정자가 있어 자연의 풍치를 음미할 수 있으며 이 정자 안에는 노송이 지붕을 뚫고 서 있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요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안동궁(安洞宮)

1955년 대한제국 황태제 의친왕이 붕어한 안동궁(安洞宮)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는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원자(元子)를 얻어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세자의 가례소를 미리 마련하고자 영건을 명하고 경연당(慶衍堂) · 정화당(正和堂) · 현광루(顯光樓) · 정상루(定祥樓) 등의 건물이 건립했다.

1881년 세자빈으로 민태호(閔台鎬)의 딸이 간택되었으며 1882년 2월 22일 안동궁에서 가례가 거행되었다.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의 가례(嘉禮)는 큰 경사였으며 역대 궁중혼례 중 가장 성대하고 호화스러웠다.

안동궁(安洞宮)은 대한제국 황실 가례소(嘉禮所)로 이용되었는데 1904(광무 8)년 순명황후 민씨가 황태자비로 봉해지고 얼마 후 붕어함에 따라 광무 10년 윤택영(尹澤榮)의 딸이 간택되어 광무 11년 1월 순종 융희제와 순정황후 윤씨의 가례(嘉禮)가 거행되었다. 문화재청은 대한제국 황실 가례소(嘉禮所)이며 대한제국 3대 추존 황제 의친왕이 붕어한 안동궁(安洞宮)을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사동궁(寺洞宮)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義親王)은 서울시 종로구 사동(寺洞)에 있던 의친왕(義親王)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에서 1877년 고조(高祖) 광무제와 귀인(貴人) 장씨(張氏)의 황자(皇子)로 태어났으며 1895년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을 순방하고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됐다.

의친왕(義親王)은 1919년 대동단(大同團)과 모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결정하여 김가진(金嘉鎭)·전협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하고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安東)에 도착했으나 일경에 붙잡혀 강제 송환되었으며 일제의 도일(渡日)을 거부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사고(史庫), 태실(胎室)을 점검하는 봉심(奉審)

봉심(奉審)은 어명을 받들어 왕실(王室)의 한성과 경기의 태묘(太廟),능침(陵寢),단(壇),전(殿),문묘(文廟) 및 지방의 사고(史庫), 태실(胎室) 등의 이상 유무(異常有無)를 살피고 점검하는 것이며 매년 정조(正朝),한식(寒食)에 하는 정기적인 봉심과 유사시에 하는 임시적인 봉심이 있었다. 춘추관은 사관(史官)을 파견하여 사고(史庫)의 이상 유무(異常有無)를 살피고 점검하였다. 국왕이 직접 문묘(文廟)에 봉심하는 것은 알성(謁聖)이라 하는데 국왕의 친림작헌(親臨酌獻)은 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행하였으며 그 외에는 성균관의 직원으로 하여금 봉심하게 하였다.정조의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신위를 모셨던 경모궁(景慕宮)에 매달 5일에 입직관(入直官)이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정당(正堂) 안에 들어가 봉심하였는데 독(櫝)은 열지 않았으며 매년 중삭(仲朔 : 음력 2월ㆍ5월ㆍ8월ㆍ11월)에는 제조(提調)와 호조ㆍ예조의 당상관으로 하여금 봉심하게 하였다.

발병부(發兵符)

조선시대 군대를 동원할 때 쓴 부신(符信)인 발병부(發兵符)는 지름 7cm, 두께 1cm 가량의 둥글납작하고 곱게 다듬은 나무쪽의 한 면(面) 복판에 '發兵'이라는 2글자를 새기고, 다른 한 면에 해당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 등의 칭호를 새겨 한가운데를 쪼개어 반쪽의 오른쪽은 현지(現地) 병권(兵權)을 쥔 관찰사(觀察使)·정3품(正三品) 절제사(節制使)가, 왼쪽은 국왕이 보관하였다.

조선 국왕이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 발병부(發兵符) 반쪽과 교서(敎書)를 내려보내면 현지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는 반쪽을 맞추어보고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국가적으로 위험한 외적의 침입·내란, 도적을 잡을 때에는 먼저 발병(發兵)한 후 국왕에게 알렸다.

절제사(節制使)

절제사(節制使)는 조선 초기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에 두었던 정3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서반 무관 외관직(外官職)이다.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는 처음에 전주(全州)와 경주(慶州)에만 두었다가 후에 광주(廣州)와 의주(義州)에도 두고 부윤(府尹: 從2品)이 겸임하였다.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는 실제로는 없었고 제주(濟州)에는 병마수군절제사를 목사(牧使: 正3品)가 겸임하였다.조선시대는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설치와 함께 절도사(節度使) 아래에 절제사 또는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생겨 전국에 걸쳐 중요한 군사 거점에 설치된 거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거진(巨鎭)은 육군의 경우 양계(兩界)에 31개소, 6도(六道)에는 24개소가 있었으며 수군은 영안도(永安道)를 제외한 7도에 12개소가 있었고 거진은 절도사(節度使)가 주재한 주진(主鎭)의 명령을 받아 자기 관할 하에 있던 제진(諸鎭)에 대해 군사상의 명령과 감독권을 행사했으나 양계에는 제진이 없는 독진(獨鎭)도 있었으며 육군의 경우 이 독진을 제외하고 모두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도호부사의 수령(守令)들이 절제사를 겸임했으며 수군의 경우는 대부분이 전임직이었다.

도교(道敎)

도교(道敎)는 조선 초기에 난립된 도관(道觀)을 정비하여 소격서(昭格署)로 하여금 제천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마니산의 초제(醮祭)가 가장 유명하다. 소격서에서는 도학(道學)을 가르치고 도류(道流)라는 관리를 두어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하였는데 세조가 도교를 숭상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사림에 의해 도교 배척운동이 일어나 소격서가 폐지되고 조정으로부터 소외되어 갔는데 다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부 재야 지식층은 도교를 신봉하면서 사대(事大)와 문약에 빠진 성리학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도인(道人)들은 환인(桓因) ·단군을 한국 도교의 시조로 김시습(金時習)을 중조로 각각 내세우면서 점차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여 일반 서민들에게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도교와 관련된 예언사상은 각종의 비기(祕記) · 참서(讖書)에 반영되어 정감록(鄭鑑錄), 토정비결(土亭祕訣) 등이 널리 유행하였다.

 

     관련기사
· 사동궁(寺洞宮) 역사문화원형 복원해야
ⓒ 새마갈노(http://www.eswn.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잎과 꽃 다름 인정하는 상사화 처럼
우리는 순례자
통일비전과 예수의 분단장벽 허물기
맞잡은 두 손 불어라 평화 바람이여!
적은 무리여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좋은 거군요!
한 서린 십자가
기후 위기 앞에 선 그리스도인
인류세와 기독교신앙
아베정권 가던 길 돌이키고 사죄하라!
진보운동계의 자아성찰서
『둥글이, 싸움의 철학』 나는 이 책을 펴기 전에는, 둥글이가...
나를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거나
비상시, 브레이크 댄스를 추시오
한국교회 지붕 햇빛발전소 설치를 ...
9월 3일(월) 오후2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교...
신재생에너지로 90% 전력공급 가...
독자 설계 잠수함 건조
'돈의문박물관마을' 13개 프로그...
서울시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시민이 직접 제안하고 진행하는 13개...
헬조선을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포천 평화나무농장 생명역동농업 산...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384-19, 성도빌딩 5층 | 전화 : 02-747-3191 | 편집인 010-8413-1415 | 제호 : 새마갈노
등록번호 : 서울 아03061 | 등록일 2014.03.24 | 발행인 : 양재성 | 편집인 : 류기석 | 청소년보호책임자 : 류기석
Copyright 2009 새마갈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sw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