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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궁(寺洞宮) 역사문화원형 복원해야
조선국 도읍(漢城) 북쪽 창건한 북궐과 경복궁 이야기
2012년 11월 26일 (월) 11:22:52 김민수 ssk0102@hanmail.net

북궐(北闕) 경복궁(景福宮)

문화재청은 조선국(1392-1897) 도읍 한성(漢城)의 북쪽에 창건한 북궐(北闕)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 시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 提調)를 겸하여 서사관(書寫官)으로 광화문(光化門) 편액(扁額)을 쓴 임태영(任泰瑛)의 서체를 원형 복원하고 경복궁(景福宮) 북원(北苑) 궐외각사(闕外閣司)를 고도(古都) 특별보존지구 및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 100년 이상의 문화재 복원 대상을 우선순위를 정하여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고도(古都)·고궁(古宮)·조개무덤·지석묘·입석(立石)·고분·혈거지, 제단·절 터·사고지(史庫址)·향교 터·사우지(祠宇址),성곽·성 터·관문 터·봉수대·옛 전쟁터·궁 터·도읍 터·수영 터,옛 길·뚝·제방·요지(窯址)·시장 터·교지(橋址)·석표, 서원·사숙·원지(苑池)·옛 집터·엣 무덤·정천(井泉)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사적(史蹟) 지정 대상이다. 경복궁(景福宮) 역사문화경관에 반하는 현대 건축물, 시설물의 신축(新築)·증축(增築)·개축(改築)·이축을 금지, 2층 · 10m 이하로 층고를 제한하고 택지 조성이나 토지의 개간 또는 형질 변경, 수목심기 및 벌채 또는 토석류의 채취·적취, 도로의 신설·확장 및 포장 등을 제한하여 경복궁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 문(門), 교(橋)의 역사적 문화경관을 복원하고 광화문(光化門),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 앞 궐외각사(闕外閣司), 북원(北苑) 권역의 현대 건축물, 시설물을 철거,이전하고 경복궁을 중건한 1867-1888년을 기준으로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대한국 태조(太祖) 고황제는 1395년 조선국(1392-1897)의 법궁 경복궁(景福宮)을 창건하여 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신무문(神武門),광화문(光化門:임태영 서체)과 동십자각,서십자각을 잇는 궁장(宮墻)을 축조하였고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국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세종(世宗)은 1426년 경복궁의 후원을 조성하는데 녹원(鹿苑),향원정(香遠亭),관저전(關雎殿),충순당(忠順堂),서현정(序賢亭),취로정(翠露亭)이 있고 북원(北苑)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오운각(五雲閣), 1칸 규모의 정자 옥련정(玉蓮亭),친경(親耕)하며 풍농 기원하는 경농재(慶農齋),군인들이 연습하는 중일각(中日閣),고조 광무제가 신하에게 칙지(勅旨)를 내린 대유헌(大有軒),문과 시행하는 융문당(隆文堂),무과 시행하는 융무당(隆武堂),과거(科擧) 시행, 군사 훈련하는 경무대(景武臺)가 있으며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은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 근정전(勤政殿),국왕의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대전 강녕전(康寧殿),중궁전 교태전(交泰殿),동궁전 자선당(資善堂),세자가 학문 강학하는 비현각(丕顯閣),세자의 사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대비전 자경전(慈慶殿),집현전(集賢殿) 수정전(修政殿), 칙사 다례, 경사에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慶會樓),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한 흠경각(欽敬閣),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한 건청궁(乾靑宮),외교사절 접견,고조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齋),내전 흥복전(興福殿),만경전(萬慶殿),전적, 서화를 수장한 집경당(集慶堂),국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태조와 태종, 왕후의 위패를 모신 문소전(文昭殿),명성황후가 별기은제를 행한 관월당(觀月堂),국왕 장례시 관을 모셔두는 빈전 태원전(泰元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혼전 문경전(文慶殿),국상시 사용한 회안전(會安殿)이 있다.

회의공간인 빈청(賓廳),대청(臺廳),정청(政廳)과 어명 출납(出納),관보 발행하는 승정원(承政院),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국정 자문,간쟁하는 홍문관(弘文館),문서 제술,사초(史草) 기록하는 예문관(藝文館),어제 어필을 보관하고 학술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檢書廳),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承文院),옥새와 마패를 관리한 상서원(尙瑞院),국왕에 대한 시위(侍衛)와 전령(傳令)을 담당하는 선전관청(宣傳官廳),5위(五衛) 통솔하는 5위도총부(五衛都總府),국왕 학습,국사 논의 위한 경연(經筵)시행하는 경연청(經筵廳),국왕의 의복과 궁내의 재화(財貨)·금·보화 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尙衣院),천문·지리·역수(曆數)·기상(氣象) 관측·물시계를 담당하는 관상감(觀象監),궁중(宮中)의 의약(醫藥)을 맡은 내의원(內醫院),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는 사옹원(司甕院),내시들이 근무하는 내반원(內班院)의 궐내각사가 있다.

궐외각사(闕外閣司)는 광화문(光化門:임태영 서체),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 앞에 있었고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숭례문 앞까지 어려서 죽은 대군이나 왕자, 공주, 옹주들의 제사를 지내는 수진궁(壽進宮),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살았던 용동궁(龍洞宮),국정 총괄,관청 통제하고 의견 조율하는 의정부(議政府),도읍 한성(漢城)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漢城府),어명에 의한 고위 관료 수사 및 심판, 탄핵에 대한 판결하는 의금부(義禁府),관직 및 법령 서경, 관리 탄핵,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직무 없는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중추부(中樞府),군무를 통괄하던 3군부(三軍府),문관 인사,공신과 종친 관리하는 이조(吏曹)와 호구 파악,통계 기록,재정 출납하는 호조(戶曹),교육,외교와 문과 시행하는 예조(禮曹),무관 인사,무과 시행하는 병조(兵曹),법령 담당,상급 재판 심리하는 형조(刑曹),모임 인허가 및 평가,물품 관리,토목 공사를 담당한 공조(工曹),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퇴직 관리들이 국왕을 자문하는 기로소(耆老所),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을 담당한 사역원(司譯院),노비(奴婢) 문서와 소송을 담당한 장예원(掌隷院),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맡은 봉상시(奉常寺),무기 제작을 담당한 군기시(軍器寺),사신 접대와 연향(宴享) 담당하는 예빈시(禮賓寺),감옥을 관장하는 전옥서(典獄署),백성의 죄를 다스리는 포도청(捕盜廳),야간 순찰 담당한 순청(巡廳),대동미(大同米) ·대동포(大同布) ·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관장한 선혜청(宣惠廳)이 있다.

건춘문 앞에 중학천(中學川)이 흐르고 의친왕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대한국 황실 가례소 안동궁(安洞宮),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가 살던 죽동궁(竹洞宮),관직 및 법령 서경,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황실 전적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도교의 초제를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국무(國巫)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기은(祈恩)을 관장한 성수청(星宿廳),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녹찬(錄撰)과 종실(宗室) 사무와 왕실 족보를 연구하는 종부시(宗簿寺),국왕의 계보,의복 관리, 어진 봉안한 종친부(宗親府),종친과 왕의 외척,왕실 외손을 예우하는 돈녕부(敦寧府),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충훈부(忠勳府),왕이나 왕세자의 사위가 속한 의빈부(儀賓府),태묘를 관리하는 태묘서(太廟署),궁중의 정원·화초·과실 관리하는 장원서(掌苑署),회화를 관장하는 도화서(圖畵署),시전(市廛) 감독하는 평시서(平市署),우유(牛乳) 공급하는 타락색(駝酪色)이 있고 영추문 앞에 백운동천(白雲洞川), 옥류동천(玉流洞川)이 흐르고 선조의 잠저(潛邸) 도정궁(都正宮),인목대비가 승하한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여승으로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태종과 세종의 잠저(潛邸) 장동궁(壯洞宮),영조의 잠저(潛邸) 창의궁(彰義宮),효종이 탄강한 별궁 어의궁(於義宮),수라상(水刺床) 감독,어명 전달,궐문 수직(守直) 담당하는 내시부(內侍府),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전시에 어명을 받아 장병을 지휘하는 체찰사부(體察使府:체부청),쌀·국수·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공급,직조(織造),내연(內宴)을 담당한 내자시(內資寺)가, 4대문 밖에 제향(祭享) 및 빈전(殯殿),수라간에서 쓸 얼음을 관리하던 빙고(氷庫),희생(犧牲)을 기르는 전생서(典牲署),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 (造紙署),경기감영(京畿監營)이 있다.

절사(節祀) 다례(茶禮)

대한제국 황제가 칙령(勅令)으로 정한 영절(令節)에 제사(祭祀)지내는 절사(節祀)는 정조(正朝:원일(元日)),상원(上元),중화절(中和節),중삼절(重三節:삼짇날),한식(寒食),단오(端午),유두(流頭),칠석(七夕),중원(中元:백중),중추절(中秋節:추석),중구절(重九節),하원(下元),동지절(冬至節),납향일(臘享日),제석(除夕)의 묘시(卯時: 05∼07시)에 지내는 제사로 제수(祭需)는 날고기 희생(犧牲)을 쓰지 않고 익힌 서수(庶羞)만을 쓰며 독축(讀祝)을 하지 않고 제주(祭酒)도 일헌(一獻)만 한다. 우리 한민족이 전통적으로 지내온 축일(祝日)인 영절(令節)은 영신(令辰), 가절(佳節), 가신(佳辰), 명일(名日)이라 하였으며 절사(節祀)를 봉제사(奉祭祀)하였다. 조선시대, 대한제국 시대까지 모든 달에 영절(令節)이 있었고 대부분의 영절(令節)이 중양(重陽)의 길일(吉日), 1, 4, 7, 10월 상순인 사시(四時), 초하룻날과 보름날인 삭망(朔望)과 연관이 있다. 길일(吉日)은 우리 한민족이 좋아하는 1·3·5·7·9라는 모든 양수(홀수)가 겹친 중양(重陽)의 영절(令節)로 설날인 정조(正朝) 1월 1일을 비롯하여 삼짇날인 3월 3일, 단오(端午)인 5월 5일, 칠석(七夕)인 7월 7일, 중양절(重陽節)인 9월 9일 등이다. 보름의 영절(令節)은 상원(上元)인 정월 대보름, 유두(流頭)인 6월 보름, 중원(中元:백중)인 7월 보름, 8월 보름 중추절(仲秋節), 하원(下元)인 10월 보름 등 보름 영절도 중양(重陽)의 영절(令節)과 같이 5일이나 된다. 작은 설이라는 동지(冬至), 동지 후 105일 후에 맞는 한식(寒食), 2월 초하룻날인 중화절(中和節)도 영절(令節)에 포함되어 절사(節祀)를 봉제사(奉祭祀)하였다. 다례(茶禮)는 초하룻날과 보름날인 삭망(朔望), 조상님의 탄일(誕日)의 묘시(卯時: 05∼07시)에 조상님께 다(茶)를 올리는 간소한 제사(祭祀)로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인 삭망(朔望), 조상님의 탄일(誕日:생신)에 지내는 별다례(別茶禮)와 황제나 황후의 3년상(三年喪) 동안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에서 조석상식의(朝夕上食儀)의 중간인 낮에 간단히 다(茶)만 올리는 주다례(晝茶禮)가 있다. 다례(茶禮) 시에는 조상님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무축단작(無祝單酌)이라 하여 축문(祝文)을 읽지 않고 다(茶)를 한 잔만 올리는 것이 원칙이다.

 

태묘(太廟) 신실(神室)에 봉안한 어보(御寶)

조선국(朝鮮國) 국왕의 이름은 휘(諱)라 하고 국왕이 관례를 행하면서 받는 호칭은 자(字), 태묘(太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조(祖)와 종(宗)의 호(號)인 묘호(廟號),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 승하하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가 있다.왕권을 상징하고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제작한 어보(御寶)는 조선국 국왕과 왕후의 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와 승하하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 등을 새기는 추상존호(追上尊號),추상시호(追上諡號)를 하였으며 추가로 선왕이나 왕후의 존호에 다시 더 존호를 붙이는 가상존호(加上尊號)를 할 때마다 어보를 새로 제작하여 존호를 올리는 의식 등에 사용하고 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인 태묘(太廟)의 신실(神室)에 봉안했으며 신주장(神主欌) 서쪽 우백호(右白虎)의 선왕의 신주는 백저건(白苧巾)으로 덮고 신주장 동쪽 좌청룡(左靑龍)의 선후의 신주는 청저건(靑苧巾)으로 덮었고 어보는 책보봉안도(冊寶奉安圖)에 보면 국조보감(國朝寶鑑)과 함께 보장(寶欌:동장)에 국왕,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책(御冊)을 책장(冊欌:서장)에 봉안하였다.어책(御冊)은 국왕·왕후·왕대비·대왕대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서로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옥책(玉冊)과 존호를 새긴 금보(金寶)를 정해진 의식과 함께 올리며 이를 책보(冊寶)라고 하며 국왕이 직접 어책과 어보를 올리는 의식은 친상책보의(親上冊寶儀)라고 한다. 어책문(御冊文)은 올리는 사람, 일시, 존호(尊號), 그리고 존호를 받는 사람을 칭송하는 송덕문(頌德文)을 간략하게 쓴다. 어보,어책의 제작에 문장을 저술한 제술관(製述官)과 보전문(寶篆文)을 쓰는 서사관(書寫官),보전문(寶篆文)을 베껴 쓴 사자관(寫字官),돌에 글자를 새길 때 글씨를 쓴 얇은 종이의 거죽에 밀을 칠하여 그 뒤쪽에서 비치는 글자 테두리를 그려서 돌에 붙이고 자꾸 문질러서 글씨 자국이 나도록 내려 앉히는 북칠(北漆) 화원,각수장(刻手匠)이 참여하였다.

어보(御寶)는 임금의 호(號)가 새겨져 있는 방형(方形)의 보신(寶身)과 제후를 상징하는 거북이·황제를 상징하는 용 등이 조각된 어보 손잡이 보뉴(寶鈕)로 구성되어 있는 전각(篆刻) 예술품이다. 1897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대한제국(1897-1919)을 건국하면서 보뉴의 거북이가 황제의 상징인 용으로 바뀌게 된다. 보신의 바닥면에는 구첩전(九疊篆)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보면(寶面)이라고 한다. 보뉴에는 어보를 잡기 편하게 하면서도 장식성을 더한 보수(寶綬)가 있으며 영자(纓子), 방울, 술로 구성되어 있다. 어보의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하였고 구리와 은을 54:23으로 혼합하고 금으로 도금하였다. 국새보다 큰 어보(御寶)는 어보를 넣는 내함인 보통(寶筒), 보통을 넣는 외함(한약재로 된 방충제 의향(衣香)을 넣어 자물쇠로 잠금)인 보록(寶盝:초피(貂皮)),보록(寶盝)을 담는 겉상자인 호갑(護匣)으로 이루어진다.문화재청은 문화기관 소장 어보는 이관하고 소장처를 모르는 어보를 찾아 고궁박물관에 국가귀속하여 전시,교육홍보하여야 한다. 어보(御寶)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국새(國璽)인 대보(大寶), 의례용 어보로 나누어지는데 대보(大寶)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 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전국(傳國)의 옥새(玉璽)를 만든 후부터 국새(國璽)를 전국(傳國)과 국권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에게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보냈고 조선국(朝鮮國) 건국이후에도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칭호,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사용하고 고려시대 후기 고려국 국왕의 용포인 청룡포(靑龍袍)를 착용하였으며 명 성조(成祖)가 조선국(朝鮮國) 국왕의 즉위나 왕후,왕세자,왕세제 책봉 시 승인하는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조선국(朝鮮國) 3대 국왕 태종에게 보내고 조선국(朝鮮國)은 이 조선국왕지인을 국가와 국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로 사용하였다. 홍룡포(紅龍袍)는 조선국 국왕의 시무복으로 세종 26년(1444) 입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건국 후 1대 고조 광무제,2대 순종 융희제가 황룡포(皇龍袍)를 입었다.

세종 대부터 국왕행보(國王行寶), 국왕신보(國王信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과거지인(科擧之印), 유서지보(諭書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의 7가지 어보(御寶)를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영조 대부터 고조 광무제 대까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한 대보(大寶), 교명(敎命)·교서(敎書)·교지(敎旨)에 사용한 시명지보(施命之寶), 관찰사,절도사의 임명 교서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시험 답안지 시권(試券) 및 과거시험 급제 증서 홍패(紅牌)·백패(白牌)에 사용한 과거지보(科擧之寶), 어제(御製)에 사용한 규장지보(奎章之寶) 등 10과의 어보(御寶)가 있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조(高祖)가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1대 광무제로 등극하여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어새(皇帝御璽),황제지보(皇帝之寶),칙명지보(勅命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시명지보(施明之寶),대원수보(大元帥寶),원수지보(元帥之寶)를 새로 제작하였다. 러일전쟁을 예견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독일,이탈리아,러시아 황제,프랑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일제가 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프랑스 대통령,독일,러시아,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2 종류인데,한 종류는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다른 한 종류는 1906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 있다. 대한국 초기에 제작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1903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국새(國璽)ㆍ어새(御璽)는 내대신(內大臣)이 관리하는 것이나 러일전쟁 발발 징후 등 대한국의 정치적인 상황때문에 고조 광무제가 대한국의 국새(國璽)를 비장(秘藏)하였다.

태묘(太廟) 태묘제례(太廟祭禮)

태묘제례(太廟祭禮)는 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 태묘(太廟)에서 봉행하며 태묘제례악(太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된다.태묘(太廟) 정전에는 대한국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 융희제에 이르기까지 19실(室)의 신위를, 별전(別殿)인 영녕전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정전(正殿)은 서편을 위로하여 1실이 있고 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 중앙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태조 고황제 위의 4대조 신위가 있다. 대한국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 의친왕을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 국제정세를 인식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한다. 부묘(祔廟)시에 선황제(先皇帝) 신위에 배알(拜謁)하는 부알판위(祔謁版位)는 태묘 정전의 신문(神門)에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부묘(祔廟)할 때 신주를 봉안하여 모시는 신로(神路)의 중간 쯤의 동쪽에 있는 사각의 검은 전돌을 깐 판위이며 3년상을 치룬 황제나 황후의 신주(神主)를 모신 가마 신여(神輿)를 잠시 주차하고 부알례(祔謁禮)를 봉행하던 판위이다. 태묘 정전의 신주장에 이미 봉안되어 있는 태조 고황제 이하 모든 신주들을 신실 앞에 있는 신탑 위에 꺼내 놓고 부알판위(祔謁版位)에서 태묘 정전에 먼저 부묘(祔廟)한 선황제들에게 부알례(祔謁禮)를 봉행한 후 밤나무 신주 율주(栗主)를 정전에 모시는 의식을 행한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춘하추동 4시(四時)와 12월 납일(臘日)에 봉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태묘(太廟) 정전과 더불어 봄,가을에 향사(享祀)하였다.제향(祭享)은 대한국(大韓國) 황제가 직접 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이 다르다. 절차는 홀기(笏記)의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되고 제기(祭器)는 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소, 돼지, 산양의 3생(三牲), 2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梁), 2제(二齊), 3주(三酒), 6과(六果), 6병(六餠), 2포(二脯), 4해(四醢), 4조율료(四俎率膋), 돼지 머리털을 몇 가닥 뽑고 염통의 피를 조금 뽑아 넣은 모혈(毛血)을 쓴다. 제수(祭需)는 매우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졌으며 곡식이나 고기는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날 것과 맨국을 쓰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은 선사시대에 생식을 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취위(就位)·영신(迎神)·신관((晨課:강신)·진찬(進饌)·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음복(飮福)·철변두(撤籩豆)·망료(望燎) 순으로 진행된다.

대한국(大韓國) 황제(皇帝)의 제복(祭服)은 면류관(冕旒冠)과 12장복(十二章服)으로 이루어진 12장면복(十二章冕服)을 착용하였는데, 면류관은 9류(九旒)를 늘어뜨리고 오채옥(五彩玉)을 꿰었다. 면류관의 모(帽) 위에 장방형 판은 짙은 흑색, 안은 홍색이며, 앞뒤에 황·적·청·백·흑·홍·녹색의 주옥(珠玉)으로 구슬줄을 황태자(皇太子)는 9류ㆍ황제는 12류(十二旒)씩 매달고 관 위에는 옥잠(玉簪)을 꽂았다. 9장복은 겉은 흑색, 안은 청색으로 한 대례복(大禮服)으로 상의(上衣) 양 어깨에는 용(龍)을 수놓고, 등에는 산(山), 양쪽 소매에 화(火:불꽃무늬), 화충(華蟲:꿩), 종이(宗彛:술 그릇)가 각 3개씩 들어가며, 하의(下衣)에 초(藻:수초), 분미(粉米:쌀), 보(黼:도끼), 불(黻:亞자 무늬)가 새겨진다. 1897년 고조(高祖)가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고 제정한 12장복은 9장복에 일(日), 월(月), 성신(星辰)이 추가되었으며 대한국(大韓國) 황제관은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대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 유릉(裕陵)

대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3월 4일 경기도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1,4,7,10월 상순의 4시(四時), 정조(正朝:원일(元日)),상원(上元),중화절(中和節),중삼절(重三節:삼짇날),한식(寒食),단오(端午),유두(流頭),칠석(七夕),중원(中元:백중),중추절(中秋節:추석),중구절(重九節),하원(下元),동지절(冬至節),납향일(臘享日),제석(除夕)의 영절(令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석인, 무석인,기린,코끼리,사자,해치,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수복방(守僕房), 수라간, 비각, 망료위(望燎位)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진입부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다.

대한국(大韓國) 2대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 그리고 순정황후 윤씨(純貞皇后 尹氏)의 능이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국이 건국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一 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홍전문까지 문석인·무석인,기린·코끼리·해치·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중앙에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으며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 남아 있다. 서울시,경기도,강원도에 소재한 조선시대(1392년-1897년) 506년 동안 존속된 조선국 25대 국왕과 왕후 및 사후 추존된 국왕과 왕후의 릉 및 대한제국시대(1897년-1919년) 황제릉을 조선국 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였는데 문화재청은 조선국 10대 국왕 연조(燕祖),15대 국왕 광조(光祖) 묘호(廟號) 추존 및 왕릉 능제 격상, 친왕릉의 제후릉 능제 격상,영친왕릉에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 및 마사코,진,구를 이장하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의 능제를 황제릉으로 격상하고 능호를 부여하여야 하며 조선국 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을 구분하여 재지정하고 교육홍보하여야 한다.

안동궁(安洞宮) 사동궁(寺洞宮)

1955년 대한제국 황태제(皇太弟) 의친왕이 붕어한 안동궁(安洞宮)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는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원자(元子)를 얻어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세자의 가례소를 미리 마련하고자 영건을 명하고 경연당(慶衍堂) · 정화당(正和堂) · 현광루(顯光樓) · 정상루(定祥樓) 등의 건물이 건립했다. 1881년 세자빈으로 민태호(閔台鎬)의 딸이 간택되었으며 1882년 2월 22일 안동궁에서 가례가 거행되었다.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의 가례(嘉禮)는 큰 경사였으며 역대 궁중혼례 중 가장 성대하고 호화스러웠다. 안동궁(安洞宮)은 대한제국 황실 가례소(嘉禮所)로 이용되었는데 1904(광무 8)년 순명황후 민씨가 황태자비로 봉해지고 얼마 후 붕어함에 따라 광무 10년 윤택영(尹澤榮)의 딸이 간택되어 광무 11년 1월 순종 융희제와 순정황후 윤씨의 가례(嘉禮)가 거행되었다. 문화재청은 대한제국 황실 가례소(嘉禮所)이며 대한제국 3대 황제(추숭) 의친왕이 붕어한 안동궁(安洞宮)을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삼청전,소격서,장원서,규장각,장생전,종친부,사간원 남쪽에 안동궁(安洞宮)의 역사문화경관에 반하는 현대 건축물, 시설물의 신축(新築)·증축(增築)·개축(改築)·이축을 금지, 2층 · 10m 이하로 층고를 제한하고 택지 조성이나 토지의 개간 또는 형질 변경, 수목 심기 및 벌채 또는 토석류의 채취·적취, 도로의 신설·확장 및 포장 등을 제한하여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義親王)은 서울시 종로구 사동(寺洞)에 있던 의친왕(義親王)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에서 1877년 고조(高祖) 광무제와 귀인(貴人) 장씨(張氏)의 황자(皇子)로 태어났으며 1895년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을 순방하고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됐다. 의친왕(義親王)은 1919년 대동단(大同團)과 모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결정하여 김가진(金嘉鎭)·전협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하고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安東)에 도착했으나 일본제국주의 경찰에 붙잡혀 강제 송환되었으며 일제의 도일(渡日)을 거부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대한제국 3대 황제(추숭) 의친왕(義親王)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을 서울시 종로구 사동(寺洞) 충훈부 남쪽, 원각사 서쪽에 사동궁(寺洞宮)의 역사문화경관에 반하는 현대 건축물을 철거하고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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